작가 한수산이 본 대선현장(유세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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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열기 안올라 오히려 민주적”
지난 대선때와는 「다르다」는 느낌부터 다가선다. 무엇보다 동원된 청중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타고온 버스도 없다.
그리고 후보가 뛴다. 아니 날아다닌다고 표현해야할,이것도 또하나의 못보던 풍경,새로움이다. 헬기를 동원해서만이 아니다. 후보를 실은 특수제작된 유세버스가 2차선 국도를 시속 1백20㎞로 달린다. 이건 선거법 위반은 아니지만 분명한 도로교통법 위반이다. 후보의 차가 달리 이를 따르는 수행원이며 보도진의 차가 또 달린다. 전국의 총알택시 운전사는 다 차출되었나 싶을 정도의 과속이다.
그리고 유권자의 표정이 편안하다. 당원들은 어깨띠를 두르거나 깃발을 흔들며 차분하고 청중들은 모든 유세과정을 즐기듯 담담한 얼굴들이다. 웃을 일 있으면 웃고,들을 말 하면 귀를 기울인다.
24일 오전 11시30분 충남 온양 김영삼후보 유세장. 흰색에 푸른 줄이 간 대형 애드벌룬이 떠있는 온양온천역광장으로 들어서는데 들려오는 노래가 있다. 귀에 익은 멜러디,어디선가 들었던 노래다.
「우리가 그대를 믿고 있음은,그대의 정직한 마음 때문에,우리가 그대와 함께 있음은,그대의 꿋꿋한 의지 때문에.」
떠돌던 기억의 화살이 5년전으로 날아가 꽂힌다. 아 그랬구나. 87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김 후보의 로고송으로 쓰였던 노래,그 노래가 다시 쓰이고 있다. 멜러디나 가사가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그때의 그 분위기 그대로다. 「구운정 조옹식(군정종식) 김영삼」하던 것이 「다시 뛰는 한국인」으로 바뀌어 있다.
군정종식에서 다시 뛰는 한국인으로 바뀐 이 로고송이 가장 선명하게 김 후보의 달라진 모습을 드러내보여주는 것만 같다.
깃발과 피킷이 지지자들의 손에서 춤추듯 흔들리는 속에 김영삼후보가 연단에 올랐다. 건강하고 온화해 보이는 얼굴이다. 이래서 선거란 좋다. 후보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얼굴이 꼭 무슨 대견한 집안 삼촌 바라보듯 다정하다. 누가 한국명을 치유할 수 있겠는가. 이미 보도를 통해 알려질만큼 알려진 내용이 그의 입으로 전해진다.
청중 사이를 헤집고 다녀보지만,유권자들의 반응이 그렇게 담담할 수가 없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서산문화회관 앞의 유세에서도 이런 청중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자들,무엇보다도 부녀자들이 많다. 기저귀가방을 들고 아이를 업고 나온 젊은 주부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활짝활짝 웃으며 박수를 쳐대는 아주머니들이 오히려 남자들을 압도한다.
청중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김 후보의 연설가운데 제일 안먹혀든다(?) 싶은 것이 3당 합당의 당위성.
그것이 없었다면 헌정중단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김 후보의 이야기가 길어지면 유세장은 청중들의 잡담으로 응얼응얼 시끄럽다. 그러나 「깨끗한 대통령」에 힘을 주면서 『아버지가 사주셨던 상도동 집에서 땅 한평 늘리지 않으며 30년을 살았습니다. 5년후 반드시 그 상도동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같은 이야기를 하면 물을 끼얹듯 조용해진다. 서산의 지리적 조건을 염두에 두고 『저도 여러분과 같이 바닷가에서 태어난 어부의 아들입니다』하는 인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피부에 와닿는 말을 그렇게 챙겨듣고 있었다.
선거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믿음은 곳곳에서 느껴진다. 온양유세의 경우,역앞 로터리 어느 곳도 교통통제가 되지 않았다. 역앞 좁은 광장에서는 유세가 이어지고 그앞의 T자형 도로에는 정상적으로 차량들이 오갔다. 자리를 못잡은 청중들은 그러므로 멀리 역앞 길 건너 인도에 늘어서서 유세를 지켜보아야 했다. 정사복 경찰에 둘러싸이고 삼엄하게 교통이 통제되던 유세장이 아니다. 민주적이라는 말을 쓰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유세장에 열기가 오르지 않는다는 말들이 있지만 도대체 열기란 게 뭔가. 돌이 날고 혈서를 쓰고 생업을 포기한 열혈지지자가 악을 쓰며 후보를 따라다녀야 그것이 열기인가.
열기가 오르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각 당의 선거대책본부는 오히려 안내도 좋은 열을 올리고 있지 않나 싶다. 유세가 끝난 서산문화회관 앞을 넘실거리며 빠져나가는 유권자들의 얼굴이 저토록 밝고 웃음 가득한데 더 무슨 열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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