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작가 한수산이 본 이모저모|장수의 나아…비결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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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와 달리 일본은 술 가게에서 만 술을 판다. 술 가게라면 술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멍가게도, 슈퍼마킷도… 어디서든 술을 파는 우리와 달리 술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담배를 지정된 판매소에서만 파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술 가게가 저녁7시면 대개 문을 닫는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술을 살 사람들을 위해 술 가게 앞에는 어디에나 자동판매기가 몇 대씩 놓여 있다.
일본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밤 12시가 가까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한 잔 마셔 볼까 싶어서 어슬렁거리며 집을 나와 술 가게 앞의 자동판매기로 갔는데, 아무리 돈을 넣어도 술은 안 나오고 돈만 도로 빠져 나오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런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청소년의 음주를 방지하기 위해 밤11시부터 다음날아침 6시까지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운운.」
집 앞 술 가게 주인은 82세의 노인이다. 유모차에 손자를 앉혀 놓고 술을 판다. 이 할아버지는 내가 몇 마디 말만 붙이면 늘 대사처럼 읊조리는 말이 있다. 지금이 바로 제일 술 마시기 좋은 때라는 것이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는 오늘 비가 와서 그런가? 요즘 날씨가 좀 쌀쌀해서 그런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자기가 60년 넘게 술 가게를 하는데 그동안 다른 물가는 1천 배가 뛴 것도 있고 2천 배가 뛴 것도 있는데 술값이 제일 안 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야말로 술 마시기에 최적 기라는 논리다(아무리 값이 안 올랐기로서니 마시기 싫은 술을 값이 싸 다고 마실까).
이 노인만이 아니다. 집 앞 상점가에서 내가 주로 이용하는 문방구 집 할머니도, DP점 주인도 다 노인들이다. 92세의 할아버지를 올 봄에 잃은 문방구 집 할머니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물으면 『80이야 넘었지』하면서 나이를 안 가르쳐 주는 할머니고, DP점 주인도 78세의 노인이다. 가위 세계 최장수국 일본이라는 통계가 실감나게 이 노인들은 매일 그렇게 가게를 지키며 일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 노인의 몇 가지 공통점이다. 우선 세 사람이 다 거스름돈을 아주 천천히 센다는 점이다. 단돈 1엔이라도 더 갈까 세고 또 세어서야 준다. 또 하나는 말하기를 즐긴다는 점이다. 뭐라고 말만 붙이면 그저 중얼중얼 떠들어댄다.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하고 물으면 대답이 한결같다. 『그야 일을 하니까 그렇지요.』통계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듯 늙어서도 일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구나 하고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 일본이다.「일하며 늘 몸을 쓴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다.」일본 노인들이 자신들의 장수비결을 말할 때 흔히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과 가까이 살아가며 느껴지는 또 하나가 있다.
이들이 이토록 오래 사는 것은 서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서가 아닐까.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괴로움을 당하고, 불편해지고, 울화가 치미는 일을「할 수 있는 한」줄여 가며 산다는 뜻이다.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층에서 내부수리 공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 집에서 접시 세트를 사 가지고 인사를 왔다. 『며칠부터 며칠간 공사를 합니다. 가능한 한 조심하겠습니다만 혹시 좀 시끄럽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위층도 아닌 아래층 옆집인데도 그렇다. 그리고 며칠 후 엘리베이터 내부가 합판으로 덧씌워졌다. 자재를 나르다가 혹시 긁히기라도 할까 하는 배려에서다. 자재가 날라져 올라가는 날은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그리고 그 집 앞까지의 복도에는 두꺼운 카핏이 깔렸다.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끌리는 일이 있어도 작업을 끝내고 그 카핏을 걷어 내면 쓰레기 하나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동네에서 누가 집수리라도 했다 하면 집 앞을 아예 막아 버리는 게 우리들이다. 골목은 모래며 자갈이며 철근 같은 자재로 지나다닐 수도 없다. 도대체 자기 집을 고치면서 왜 남에게 이처럼 피해를 주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토끼장」같은 작은 집에서 살며 「만원 전차」에 시달리는 자신들을 두고 일본인은 곧잘「사부원빈」이라는 말을 쓴다. 회사는 부자지만 사원은 가난뱅이들이라는 말이다.
같은 의미로「국부민빈」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진 경제력에비해 일본인의 개인생활을 들여다보면 참 못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검약과 저축이라는, 물밑에 잠겨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빙산을 모르진 않지만.
그런 속에서 자족하며 서로 속썩일 일 삼가며 살아가는 나라 일본.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은 좋은데 고령화 사회에 걸맞은 복지시설이 부족해서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나라. 그것도 일본의 한쪽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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