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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유세(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삼국지』나 『열국지』같은 중국 고전들을 보면 「세치 혀(설)로 설득시키겠다」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어려움에 빠져 있을때 목숨을 내건 싸움을 벌이지 않고 말로써 적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세치의 혀가 백만의 스승보다 강하다」는 말은 전국시대때 조나라의 모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는데 평원군과 함께 설객으로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간 모수는 까다로운 효열왕을 말한마디로 구워삶아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객들이 모두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실패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설득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을 공연한 설득에 나서 스스로 더욱 빨리 패망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설객의 성사여부는 말을 잘하느냐,못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얼마나 믿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선거유세도 말하자면 일종의 설객행위인 셈이다. 투표할 대상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에게 후보당사자의 유세나 지원유세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결정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유세자들은 유권자들을 앞에 놓고 온갖 말솜씨를 동원해 사자후를 토한다.
말솜씨는 사람마다 다르다. 물흐르듯 거침없이 쏟아내는 달변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좀 모자라는듯 하고 막힐 때가 많은 눌변도 있다. 하지만 모든 달변이 듣는 사람에게 무조건 신뢰를 주는 것은 아니고,모든 눌변이 듣는 사람에게 무조건 불신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하면 오히려 믿음이 덜가기도 한다. 「말 잘하는 사람은 거짓말도 잘한다」는 우리네 속담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개인연설회를 1천5백40회까지 허용하고 있다. 후보 10명이 허용된 개인연설회를 모두 사용한다면 선거운동기간중 1만5천여회의 선거연설,곧 말잔치가 벌어지게 된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올 「말의 성찬」가운데서 유권자의 「표」와 직접 연결될 정직하고 신뢰를 주는 말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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