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0·26으로 역전됐다|중정-보안사 힘 겨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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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78년 여름, 최전방 모 사단의 철책선 근무부대에서 큼직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일반국민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대대장(중령)이 월북해 버렸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진노했다. 남-북 쌍방간에 사법들의 월북·월남은 간간이 있어 왔고 그나마 우리측의 경제력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한 70년대를 지나 면서는 월북사건은 뜸했던 터였다.
전방대대장의 월북은 군내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급기야 중앙정보부가 대통령의 특명을 얻어 보안사령부에 일대 수술을 가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해당 사단의 사단장 K소장(현재 모회사 사장)은 문책 당한 뒤 옷을 벗었다.
사건당시 국군보안부대 장교로 근무했던 C씨의 회고.
『그 대대장은 월북하면서 자기당번병과 통신병 등 사병 두 명을 데리고 갔어요. 도중에 한 명이 월북을 꺼리자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다른 한 명과 함께 북한으로 달아났지요. 뻔한 각본대로 그 대대장이 곧 대남 방송에 등장하더군요.「썩은 남한사회가 싫어 탈출했다. 특히 보안부대의 횡포가 보기 싫고 지겨웠다」는 내용이 되풀이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난리가 났지요. 그러나 보안부대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사실 당시 그 대대장에 대한 보안부대의 조치는 정당했어요. 다만 일이 어처구니없게 꼬였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던 겁니다.』

<박대통령 "수사" 특명>
C씨에 따르면 월북한 대대장 L모는 돈 문제·여자관계 등 갖가지 비리로 물의를 빚고 있어 관할 보안부대의 조사를 받았다. 부대전투력의 심각한 저해요인은 당연히 보안부대의 소관사항이었다.
『최전방대대의 지휘관인만큼 극도의 보안 속에 대대장을 은밀히 불러 수사했습니다. 그 결과 군법회의에 회부할 사안임이 드러났어요. 그때 바로 구속조치를 했으면 되는 건데, 대대장의 유고가 빚을 부대 원들의 동요가 문제였습니다. 일단 돌려보낸 뒤 절차를 밟자는 판단아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귀대시켰지요. 그런데 이자가 고민 끝에 그날 밤으로 휴전선을 넘어 버린 겁니다.』
일이 이쯤 되자 사건수사는 보안부대의 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김재규의 중앙정보 부에 칼자루가 맡겨졌다. 당시의 중 정은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통제·감독할 권한이 있었다. 대공사건이었던 만큼 김재규 부장은 사건을 5국(대공수사담당)에 맡겼다.
보안사출신들이 곧잘 1980년 불교계의「법란」에 비유하곤 하는 이른바「1·19조치」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일련의 흉흉한 흐름은 또한 5공화국의 출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안사 비리 캐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득세에는 물론 10·26과 12·12가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실상「집권 전사」로 불려도 될 정보기관간의 암투가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60∼70년대에 걸쳐 중앙정보 부와 보안사(국군보안부대)는 치열한 힘 겨루기를 벌였다. 경찰에도 정보기능이 있었으나 이 두 기관에 비하면 일개 머슴 격에 지나지 않았다.
정보기관은 속성상 활동영역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자체권력을 살찌우려 하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권력기관과 크고 작은 마찰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법과 제도로 조정되어야 했지만 사실상 박정희1인 체제였던 당시에는「각하의 뜻」이 법조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일반 국민들은 이름만 들어도 섬뜩해 했던 두 권력기관이 베일 속에서 벌인 씨름은 가위 용호상박이라 할 만했다.
당시 중앙정보 부 요원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B씨의 기억.
『월북사건의 관련자는 물론 대대장 L모를 조사했던 보안부대 원, 여타 일반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조사했습니다. 박대통령으로부터「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수사하고 원인을 규명하라」는 엄명이 떨어진 탓에 서슬이 시퍼럴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군내 여론을 청취해 보니 보안부대에 대한 원성이 적지 않았어요. 보안부대 하급자가 직분을 넘어서 장성급 지휘관을 상대로 압력을 넣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특정지휘관에게 불리한 정보보고를 일부러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또 민간인을 상대하는 보안부대 원의 경우 지방기관장에서 기업체 사장에 이르기까지 두루 손을 뻗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습니다. 「각하께 충성하려 해도보안부대가 걸려서 제대로 충성하기 어렵다」는 말이 일부 장교들의 입에서 나올 정도였지요.』 중앙정보 부는 사건수사를 마무리하면서 박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보안사가 대 민간 정보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동시에 각종 비리에 연루된 보안부대 원들을 정화하자는 의견도 냈다.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 지시가 구체화된 것이 앞서 말한 79년 1월19일의「1·19조치」.

<차지철도 맞장구>
당시 보안사령부의 영관 급 장교이던 A씨의 설명.
『통상 보안부대의 임무는 대 전복·대 태업·대 간첩의 세 가지로 나뉩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일반 민간인이 정보수집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어요. 이때 자칫하면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습니다. 80년대 들어서도 몇 차례 이런 물의가 빚어지지 않았습니까. 70년대 당시보안사요원이「정보업무를 하고 있다」면 그건 민간정보를 다루는 일을 담당한다는 의미였어요.「보안업무」라면 군 관련 정보업무를,「대공 한다」는 것은 간첩 잡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고요. 전시나 계엄 하가 아닌데도 군이 정당·언론·경제부처 등 일반사회에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정보업무 때문이었는데, 1·19조치는 바로 이 대민 정보활동을 없앤 조치였습니다. 한마디로 보안사의「힘」을 빼 버린 조치였지요. 그때 보안사의 정보 처는 방위산업 처로 바뀌었고, 줄잡아 70여명 가량의 요원들이 일반부대로 전출되거나 아예 군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시의 보안사 인원규모를 감안하면「대학살」이라고 불 릴만 했어요.』
이 조치의 배경에는 물론 비대해진 보안사를 견제하려는 김재규 정보부장의 의도가 작용했다. 중 정 간부출신 K씨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와 합세해 보안사의 손발을 잘라 내는 일을 적극 찬성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말.
『77년9월에 대통령령으로 3군 보안부대가 국방부산하의 국군보안부대로 통합됐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임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조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통합보안부대의 위력이 자연히 드러나게 됐지요. 그래서 다른 권력기관으로부터 칼질을 당하게 된 겁니다.
특히 중앙정보 부 같이 막강한 기관일수록 자기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 생기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속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따로 정보 팀을 운용하고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도 김재규와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비슷한 사례로, 김 부장과 차 실장이 합작해 총선 패배의 책임을 덮어 씌워 김정렴 비서실장 세력을 몰아냈던 78년12월의 개각을 연상하면 됩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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