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한국판 '엑손 플로리오법'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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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밤잠을 자다가도 놀라서 깬다고 한다.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걱정때문이다. 만약 포스코가, 그리고 삼성전자가 외국인 소유기업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하지만 해당 기업의 경영진들과 재계는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반박한다. 상당수 전문가들 역시 M&A 공격수단에 비해 방어수단이 현저히 제한적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엑슨 플로리오법을 도입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미 여야 의원들은 한국판 엑슨 플로리오법을 발의한 상황이고, 재계는 노동계와 손을 잡고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 이 법이 필요한지, 법 내용은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미국의 엑손 플로리오법(Exon Florio)은 1987년 일본의 후지쓰가 미국의 반도체 회사인 페어 차일드를 인수하려는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 돼 탄생했다. 페어 차일드는 실리콘 밸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반도체 회사였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경쟁국인 일본의 기업에 대한 사회적인 경계심리가 팽배했었던 터인지라 일본 회사에 그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고조됐다. 그리고 반도체 산업은 고성능 무기개발에 필요한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이 중시돼 국가안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후지쓰는 스스로 페어 차일드의 인수를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법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88년 상원의 엑손 의원과 하원의 플로리오 의원이 공동으로 발의한 의원입법이다. 법의 목적은 미국 기업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로부터 미국의 국가안보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정부 개입으로 외국인투자가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그런데도 레이건 행정부는 의회의 요구를 과감하게 수용했다. 엑손 플로리오법에 따르면 대통령 또는 그가 지명하는 자는 외국인이 지배함으로써 국가안보를 해칠 현저한 우려가 있는 미국 기업의 M&A를 조사할 권한을 갖는다. 더불어 당해 기업의 M&A를 정지하거나 금지시킬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는다. 외국인은 M&A를 진행 중이거나 종료한 경우 대미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에 자발적으로 신고할 수 있지만 위원회가 직권으로 외국인 직접투자를 검토할 수도 있다.

위원회는 외국인의 신고로 접수받은 지 30일 내에 조사를 개시해 45일 이내에 그 승인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외국인 투자가 미국의 국가안보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위원회가 결정하면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통령은 15일 이내에 그 M&A를 정지 또는 금지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대통령의 결정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국가안보를 해칠 우려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국가안보에 필요한 국내생산, 국내산업의 역량.규모와 이에 영향을 주는 외국인에 의한 국내산업과 영업의 지배, 테러지원 또는 군수품 등 거래 가능성, 미국의 선도기술에 미치는 영향 등 제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제정 당시 이 법은 원거리통신, 반도체, 로봇공학, 생명공학, 제약 등과 같은 첨단 기술산업에 적용될 것으로 인식됐으나, 요즘 들어서는 에너지와 통신 등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대(對)정부 공급계약을 맺는 거의 모든 기간산업에 대해 국가안보의 개념을 확장해 적용돼 왔다. 이는 클린턴 대통령이 1998년 5월부터 '핵심 기간산업 보호정책(critical infrastructure protection.CIP)'을 시행함에 따른 것이다. 이 정책은 핵심 기간산업의 피해와 훼손.파괴를 방지하거나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9.11 사태 이후 더욱 중요해졌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미국의 기간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더욱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해 많은 규제강화 법안들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법을 도입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존의 방위사업법이나 외국인투자촉진법.증권거래법 등 현행법으로는 외국인이 기간산업과 국가전략산업을 지배하고, 이로 인해 국가안보와 경제안보.기술안보가 위협받거나 침해되는 걸 충분히 막을 수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여야 의원들이 국가안보 또는 경제안보를 위협하는 외국인 투자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이상경 의원은 '국가안보에 반하는 외국인 투자 규제에 관한 법률안'을, 이병석 의원은 '국가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 등에 관한 법률안'을 상정해 놓고 있다. 두 법안은 큰 틀에 있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이므로 적절한 조정을 거쳐 단일 법안으로 통합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본다. '국가안보'를 위해하거나 '국가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 투자조사위원회가 조사하고, 조사 결과에 따라 투자 철회와 기타 의결권 제한 및 처분을 명령하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하게 한다. 또 위반 시에는 징역 또는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양 법안에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조정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규제대상 범위와 관련해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한 규제는 OECD 규약이나 국제협약 등에서 국가안보의 보호 필요성이 있는 경우에 그 법률적 정당성이 허용된다. 따라서 너무 포괄적인 '국가경제'보다는 '국가안보'라는 용어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규제대상 기업의 범위는 법률보다는 시행령에서 포괄적으로 업종 범위를 명시하는 게 좋겠다. 또 규제대상 행위는 외국인에 의한 모든 투자보다는 경영지배권 취득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 투자규제의 남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의 조사는 무엇보다 국가안보의 위협 문제에 대한 판단의 신중성과 대외적 신뢰유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조사위원회는 각 정부 부처의 장관으로 위원을 구성하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사 결과에 따른 조치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취득한 지분의 의결권 제한과 처분, 투자 철회 명령이 가능하도록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좋다. 벌칙 역시 과중하지 않은 선에서 합리적으로 절충해 조정하면 된다.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등 주요 경제대국들은 2~3년 전부터 외국인 M&A로부터 자국의 국가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기존의 외국인 투자규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국가의 전략산업과 기간산업이 외국인에 의해 절대적 지배 상태에 이른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의원입법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송종준 충북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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