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점장 왜 죽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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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CD발행 거액사채 끌어들여 손해입은 업자가 협박 가능성/어음이용 돈 메우려다 역부족”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씨는 왜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나.
경찰수사에서도 아직 정확한 동기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거액의 금융사고를 낸뒤 수습할 수 없는 절박한 한계상황에 이르러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이씨가 사채시장과 관련을 맺으면서 거액의 개인비밀계좌를 운영해오다 최근 엄청난 손해를 보게된 것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국에서 자금동원 능력이 가장 크다는 상업은행 명동지점장인 그가 수습할 수 없는 금융사고에 휘말렸다면 그 규모는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씨는 특히 어음이나 당좌수표외에 양도성 예금증서(CD)를 통해 사채시장과 거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이씨는 금융계에서 CD발행을 통한 예금유치의 1인자로 알려져 있을 정도』라며 『CD는 「블랙머니」거래에 많이 쓰이므로 CD판매량이 많다면 그만큼 사채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씨는 CD발행 등을 통해 사채를 끌어들인뒤 긴급자금이 필요한 기업체에 대주는 중개인역할을 해오면서 엄청난 예금유치실적을 올려 지난해 서소문지점장으로 있을때 전국 최대의 수신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 일부 사채업자들이 실세금리가 하락하는 과정에서 거액을 떼먹고 도주하거나 부도를 내는 등 큰 「구멍」이 난데다 가짜 CD사건까지 터져 사채시장이 얼어붙고 자신이 판매한 CD나 어음의 결제일이 다가오면서 수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었을 것이라는 금융계의 추론도 있다.
이씨 가족들은 『지난달 말부터 평소 쾌활한 성격의 이씨가 우울증세를 보여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씨의 「이면거래」가 잘못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사채시장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은행지점장이 사채업자에게서 협박당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는 금융권의 관행으로 볼때 손해를 본 사채업자가 이씨에게 압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만일 비위사실을 본점측에서 알았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추궁이 시작됐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씨는 궁지에 몰리자 내부결재까지 끝나 금고에 보관중인 3백억원의 약속어음까지 빼내 사채시장에서 할인,돈을 메우려했으나 역부족이자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씨가 평소 친분있는 고객의 예금계좌를 조작해 대월해준 것처럼 꾸며 당좌수표를 발행,유통시켰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도 그같이 다급한 상황의 반영이란 풀이다. 29일로 예정된 장녀(23) 결혼식을 보름 남짓 앞두고 죽음을 택한 것은 결혼식전 자신의 비위사실이 드러나 가정이나 은행에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히게 될 처지가 돼 죽음으로써 이를 막았다는 추측도 나돌고 있다.<이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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