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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밭」눈치에 밀린 추곡수매/길진현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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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올해 추곡수매는 정부안보다 인상률을 1% 올리고 수매량을 1백10만섬 늘리는 선에서 결론이 내려짐으로써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표밭」논리에 밀려 해마다 되풀이 해온 숫자놀음에 그쳤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이번 추곡수매는 새로 들어선 중립내각이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이뤄져온 「수매가인상→재정부담증가→민간유통기능 위축→수매압력 가중」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하느냐의 여부가 큰 관심사가 됐었다.
현행제도는 정부가 일정량의 쌀을 사줌으로써 농가의 소득을 보호해주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농가에 실제로 돌아가는 소득에 비해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번 추곡수매로 농가에 돌아가는 소득을 따져봐도 추곡수매가 「생색내기」에 그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인상률이 5%에서 6%로 높아짐에 따라 농가에 추가로 돌아가는 돈은 가구당 평균 만6천여원. 시장판매보다 추곡수매를 통해 얻는 농가 추가소득은 모두 33만여원 정도에 불과하며 게다가 영세농일수록 혜택이 덜 돌아가는 실정이다.
반면 정부가 추곡수매에 들이는 비용은 수매가 인상에 따른 추가비용 2천6백74억원을 포함해 2조1천7백52억원(농협수매분 2백50만섬 포함)에 달한다. 이 때문에 매년 재정부담을 안아가며 추곡을 수매하는 것 보다는 농민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것이 낫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2조여원에 이르는 추곡수매 비용중 실제로 농민에게 돌아가는 5천여억원을 제외하고 남는 돈으로 경지정리를 하는 등 농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쓰는게 낫다는 것이다.
국제 쌀값과 국내 쌀값의 차이가 최고 여섯배에 이르는데도 수매가 인상을 통해 가격차를 높인다면 외국의 업자들에게 국내 쌀시장이 「황금어장」으로 비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결국 쌀시장 개방압력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 때문에 행정부뿐 아니라 국회에서조차 『여소야대때 추곡수매안 국회동의제가 도입됨으로써 수매제도가 빛을 잃었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해왔다. 그러면서도 대선정국에 밀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 오늘의 현실은 또 한차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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