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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말리는 시위군중 몰래 평양행 백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남북 연석회의(7)>
김구가 북행하던 날인 48년 4월19일 아침 그의 숙소인 경교장(현 고려병원)은 북행 반대 시위로 수라장을 이뤘다.
새벽부터 삼삼오오 모여들던 시위 군중은 날이 밝자 5백여명으로 불어 이내 경교장을 애에워쌌다.
『김구북행 결사반대』….
군중의 함성이 막 부서지는 봄 햇살을 가르고 메아리쳤다.
잠시 후 7백평 남짓한 뜰 안은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월남동포, 청년·부인들과 김구의 측근, 고향사람들이 뒤엉켜 북행을 반대하는 열변을 토했으며 결의문을 가지고 김구의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구는 이에 아랑곳 않고 오전 9시가 되자 비서 선우진 에게『떠나보세』라며 굳은 결의를 보였다. 이윽고 김구가 뜰 앞에 대놓은 차에 오르자 부녀자들과 학생들이 차 앞으로 몸을 던져『선생님, 기어코 가시려거든 저희들을 죽이고 가십시오』라고 아우성을 쳤다.
통일 독립 운동자 협의회를 이끌계 남북협상을 지지했던 임정계 유림도 나서 북행만은 안 된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김구는 상기된 모습으로 2층 거실로 되올라갔다.
이번엔 이른바「안명근 사건」·(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11년 황해도 부호들을 협박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적발된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같이 옥고를 치른 도인권 목사가 한사코 김구의 옷소매를 당기며 말렸다.

<"마지막 기회" 설득>
그러나 꼭 가겠다는 노 혁명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김구는 정오쯤 되자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내고 군중에게 사자후를 토해냈다.『나는 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70유여년이 되었다. 더 살면 얼마를 더 살겠느냐. 여러분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시위군중은 막무가내였다.
김구는 다시『누가 뭐라해도 좋다. 북한의 공산당이 나를 미워하고 스탈린의 대변자들이나를 시베리아로 끌고 가도 좋다. 북한의 빨갱이도 김일성도다 우리들과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시위사슬」이 풀리지 않자 김구는 아들 신(당시 26)과 비서 선우진 에게 경교장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비서 선우진씨(71)의 증언이다.
『김신 씨와 나는 집 주위를 둘러본 끝에 경교장 뒷길을 이용해 빠져나가기로 했습니다.
먼저 방안에 들어온 부인네들을 2층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인 안미생의 방에 데려온 다음 뒤뜰에 흩어져 있던 군중도 경관을 시켜 앞뜰로 모이게 했지요. 운전사 정태훈씨에게는 김구선생 승용차 중 고장이 나 수리 보냈던 다른 차를 고쳐 뒷담 밑 석물점 앞에 세워놓도록 했습니다.
오후2시쯤 정씨가 차를 고쳐 대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김구 선생, 나, 김신씨 3명은 뒷 계단과 취사실을 통해 뒷담을 넘어 승용차에 몸을 실었지요
해가 질 무렵인 6시45분쯤 차가 38선상의 여현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김구 선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김구 선생의 뒤를 따라와 38선 푯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달라고 졸랐어요.
사진을 찍은 다음 기자들이「이번에 가시면 꼭 통일이 성사될 것으로 믿습니까」라고 묻자 김구 선생은「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한두번 회담을 계속할 때 성사가 있으리라 믿는다고 했습니다.
기자들이 다시 몇 마디 더 묻자 김구선생은「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가야지」라며 갈길을 재촉했지요.」
김구가 여현 역을 지나 저녁7시쯤 조그만 마을에 이르자 북쪽 보안대원 3명이 자동차를 가로막고 일행을 사무실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들은 곧 소지품조사를 한 뒤「오이가 몇 개에 갓이 몇 개」하는 식의 암호로 평양상부와 전화연락을 해댔다.
그러나 3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김구는『너 이놈들, 이럴 수 있느냐. 점심도 안 먹은 사람들을 이렇게 대접할 수가 있단 말이냐…』고 추상같은 호령을 했다. 선우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보따리 샅샅이 검사>
『밤 11시쯤 내무성 부국장이란 자와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이란 노인이 평양까지 갈 차를 가지고 나타났어요.
그들은「방송을 들으니 정거장(경교장을 두고 한말) 에 저지군중이 많아 김구 선생이 떠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하기에 오늘은 못 오는 줄 알았다」고 늦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일행은 새벽 1시쯤 남천의 한 여관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고 아침 9시쯤 길을 나서 오후4시쯤 평양에 도착했지요.
상수리 특별호텔(47년 여름 미군정 브라운 소장을 맞이하기 위해 개인 저택을 개조한 것)에 여장을 풀었는데 착검한 인민군의 어마어마한 경비가 섬뜩했습니다.
호텔에 온지 1시간쯤 지나 김두봉이 2층 김구 선생 방을 찾아왔어요.
김두봉은 김일성이 인사하러오지 못한 것은 이곳이 호텔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평남도청 건물이었던 인민위원회사무실로 김구 선생을 안내했습니다.
곧 36세 가량의 청년이 문밖으로 나와「제가 김일성입니다. 먼길을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한 탓으로 도중에 고생되신 점이 많았을 줄 압니다. 선생님의 고명은 벌써부터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어요.
이에 김구 선생은「나 김구요」하면서 김일성과 악수를 한 뒤 아들 신과 나를 소개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약 20분쯤 김일성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 김두봉의 안내로 숙소에 되돌아 왔지요.』
김구의 평양길-김일성 면담은 이처럼「첩첩산중」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의 북행은 양상이 사뭇 달랐다.
김규식은 21일 새벽6시30분 원세훈·김붕준 등 민족자주연맹(민련)대표 16명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짙은 안개를 뚫고 장도에 올랐다.
환송객 차를 포함해서 모두 16대의 승용차는 4명의 종로서 경관이 탄 지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이들이 에스코트를 받은 것은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특별배려 때문이라고 한다.
김규식 일행은 정오쯤 개성을 지나 1시쯤 38선상의 여현에 도착, 건국 실천양성소 청년들과 38경비대원들로부터 목이멘 환송을 받았다.
당시 민련 비서처장으로 김규식을 수행했던 송남헌씨(78)는 북쪽여정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북측은 민련 대표들이 늦게 오자 여현역 구내에 대기중이던 특별 열차를 남천 역으로 후퇴시켜 놓았습니다.
일행은 평양에서 보내올 교통편을 기다리는 동안 인근 민가로 안내됐지요. 그런데 사복차림의 보안서원이 일행의 짐 보따리를 샅샅이 검색하자 김규식 선생은「21년 극동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레닌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며 호통을 쳤어요.
빔9시쯤 평양에서 보내온 소련제 지프(일명 발바리)를 타고 일행은 남천을 향해 떠났지요.
22일 새벽1시쯤 남천에서 특별 열차로 평양에 도착해 보니 아침6시였습니다. 평양까지 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지요. 평양시내에 들어서자 도로변 전신주마다「단정단선반대」 「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남조선 대표들에게 영광 있으라」는 등의 표어가 나붙어 있더군요.』김규식은 김구가 묵고있던 상수리 특별호텔로 안내됐다.
북측은 이미 호텔 2층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완구, 아래층은 엄항섭·송남헌·김신·권태양·조선통신 최명소 기자에게 방을 잡아놓은 터였다.
김규식이 여장을 풀고 쉬고있는데 오전11시쯤 김일성·김두봉이 방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송씨의 증언 계속-.
『먼저 김두봉이 김일성을 소개하면서「이분이 김일성 장군입니다」라고 운을 뗐어요.
이에 김일성은「원로에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라는 평범한 말로 첫인사를 건넸습니다.
김두봉은 과거 연희전문 시절 김규식 선생의 제자였고 중국에선 독립운동을 같이 한 동지였지요.
김일성과 김두봉이 방에 들렀을 때 침대에 누워있던 김규식 선생은 비스듬히 일어나 인사를 나눴습니다. 두 김씨의 방문은 김규식 선생의 도착 문안을 드리는 예방이어서 깊은 대하는 없었습니다.』
한편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측 정당·단체는 모두 40개였는데 한독당·민련 대표를 빼고는 4월 중순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남노당 정치위원 대부분은 4월13일까지 이미 입북을 마치고 4월16∼17일에는 북남 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를 가졌었다.
그러나 남노당계·중간파 정당인사들의 북행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숙소배정 신경전>
이에 대한 전 북한 고위관리였던 서용규 씨의 증언이다.
『북노당은 미군정 측이 연석회의에「파괴분자」를 잠입시킬 경우를 대비해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북노당은 이에 따라 남노당이나 그 밖의 정당·단체들에 38선 월경루트와 암호를 사전에 알려주는 은밀한 공작을 펼쳤지요.
예컨대 개성·김천 루트는 암호명을「속리산」「송악산」으로 정했고 의정부·연천, 양양·속초루트 등은「지리산」「한라산」「금강산」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행루트와 암호사이에 혼선이 빚어져 일부 인사들은 소련군이나 북쪽 경비대에 붙들려 유치장에 갇힌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지요.
이 같은 사태는 북노당 정치공작원 성시백선과 남노당, 그리고 북노당내 연안파가 제각기 나서 남한의 정당· 단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과정에서 빚어졌습니다.』
이들은 숙소배정 과정에서도 자신이 끈을 대고있던 남한인사에게 더 좋은 곳을 주려고 신경전을 벌였다고 한다.
물론 이 해프닝의 밑바닥에는 북노당 국내파, 남노당, 연안파가 자신의 세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게 서씨의 증언이다.
어쨌든 48년4월 남북의 내로라 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어렵고도 험난한 여정을 거쳐 한자리에서 무릎을 맞댔다.
김구·김규식이 분단의 벼랑 끝에서 협상의 팔을 걷어 붙인지 근 두달만이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가 평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땐 이미 남북 연석회의는 막이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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