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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스파이ㆍ테러 차단" 새 화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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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1996년 10월 1일 밤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아파트 통로. ‘픽-’ 하는 나지막한 총성과 함께 괴한 한 명이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영사관에 근무하던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최덕근 영사.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그는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했던 러시아 정부는 단순한 강력사건으로 종결 짓고 우리 정부에 결과를 통보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생과 사의 첩보전과 얽혀 있었다. 그는 당시 북한에서 생산하는 100달러 위조지폐 일명 ‘수퍼노트’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의 뒷마당으로 우리 요원에겐 전선(前線)이나 다름없었다. 주로 탈북자들을 통해 정보를 캐던 최 영사의 움직임은 북한 정보망에 포착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최 영사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당시 우리 정부와 안기부는 북한을 의심했지만 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국정원 직원들이 원내 사격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최근 국정원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우수 인재들이 몰리고 있다.


최 영사는 지금 ‘이름없는 별’이다.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 보국탑에 사망연도와 별이 새겨져 있다. 요원으로 활동하다 숨진 45명과 더불어서다. 대북 관련 업무를 수행하거나 중동ㆍ아프리카 등 해외에서 활동하다 숨진 요원들이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한 단면이다. 국정원 직원들은 원장과 몇몇 간부를 제외하고는 얼굴과 실명이 공개되지 않는다. 국정원은 국가 안보의 보루다. 실패는 대대적으로 공표되지만 성공담은 얘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국정원은 ‘두 개의 얼굴’로 국민에게 비춰지고 있다. 거대 권력기관이자 정권의 도구였던 오욕의 역사 때문이다. 초법적 고문·도청ㆍ정치 사찰 등이 남긴 후유증이다.

지금 국정원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민주화의 진전, 남북관계 변화, 글로벌 경제전쟁, 인터넷 보급을 비롯한 정보혁명은 국정원의 역할과 기능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탈권력화ㆍ탈정치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새로운 도전과 위협이 생겨났고, 거기에 맞춰 지평을 넓혀야 할 판이다.

경제안보 새 전선 맡아

지난해 10월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 야근을 하던 직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최근 반도체 차세대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핵심 연구원 A씨가 갑자기 이민을 간다며 일주일 뒤에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다. 제보자는 중소 반도체 관련 기업 사장 B씨였다. 다음날 국정원은 사건전담반을 편성해 A씨를 만나 정황을 들은 후 바로 내사에 착수했다. 국정원 요원들이 2교대로 24시간 이 연구원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연구원 A씨와 공범들의 범행 정황이 포착했다. 국정원은 내사 내용을 검찰에 넘겨 연구원과 공범들을 긴급 체포하도록 했다. 2003년 이 센터 설립 이후 지난 5월까지 적발한 기술유출 시도는 100여 건. 이 기술이 해외로 빼돌려졌다면 기업과 우리 경제에 미칠 피해 예상액만 118조원에 이른다. 국정원 관계자는 “산업스파이를 색출하는 국정원의 활동상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센터로 접수되는 제보가 늘고 있다”며 “국정원이 대공 업무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일반의 인식이 정착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라는 새 안보 전선을 국정원이 맡게 된 셈이다.

국정원의 변화와 개혁은 현 정부의 화두였다. 2003년 5월과 2004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조직개편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경쟁력 있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원 분야를 줄이고 테러ㆍ산업ㆍ보안ㆍ국제범죄 등의 부서로 인력을 재배치했다. 국내 부서를 축소ㆍ재편하고 부처와 기관 출입은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개선했다. 북한과 관련되지 않은 일반 보안사범 수사권을 검·경찰에 이관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분야가 바로 첨단기술 유출 방지와 산업스파이 수사 업무다. 그 중심에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있다.

국정원 ‘국가사이버안전센터’의 활동도 주목거리다. 이 센터는 2003년 1월 웜 바이러스의 대량 감염으로 국내 인터넷 전산망이 동시에 마비됐던 ‘1ㆍ15 인터넷 대란’ 발생 1년 뒤인 2004년 2월 설립됐다. 센터 설립 이후 지난 5월까지 모두 2만여 건의 사이버 공격 시도를 차단했고, 1만4000여 건의 침해사고에 대한 피해 복구 활동을 벌였다.

공채 경쟁률 100대1 웃돌아

국정원 채용설명회는 국정원에 대한 인식 변화를 실감케 한다. 국정원 관계자는 “해마다 실시하는 신입직원 공개채용 시험 경쟁률이 100대1을 넘는다”며 “대학 방문 채용설명회를 열려고 해도 과거에는 총학생회에서 거부 시위를 했지만 지금은 방문하지 않은 대학 측에서 ‘왜 우리한테는 오지 않느냐’고 문의할 정도”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4월 연세대ㆍ고려대ㆍ경희대 등에서 열린 채용설명회에는 강의실이 꽉 찼다. 아무리 구직난이라 해도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에 고급 두뇌가 몰리고 있는 셈이다. 고급 전문인력 수혈도 부쩍 늘어났다. 국정원은 올 3월 국제통상법ㆍ변리사ㆍ정보보호 등 모두 18개 분야에서 인력을 선발했고, 5월부터는 중남미ㆍ러시아 경제, 국제금융, 원자력, 화학무기 등 14개 분야의 전문가를 모집하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 유수의 정보기관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전문성 있는 고급 인력 확보가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수사권 폐지 논란 계속될 듯

국정원의 탈정치화ㆍ탈권력화는 여전히 개혁의 핵심 이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근절 문제는 계속 제기돼왔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쉽게 끊지 못했다. 61년 6월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수십 년 동안 국정원은 정권의 도구로 악용돼왔다. 국가 안보와 정권 안보, 국가 이익과 정권 이익을 동일시하는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80년대 안기부는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정치에 관여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94년 6월 국회 정보위원회가 설치돼 처음으로 국회의 정보기관 통제 시스템이 도입됐다. 내부적으로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사라져 정보수집과 정책수립 기능이 분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 개입 등 과거의 악습을 청산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는 ‘작지만 강력한 정보기관’을 표방하며 명칭을 국가정보원으로, 중앙정보부 이래의 부훈(部訓)인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꾸었다. 조직과 기능을 대폭 개편하고 슬림화했다. 하지만 불법 도청을 비롯한 구시대의 병폐는 고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국정원은 시험대에 서 있다. 더구나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정원은 선거 중립을 위해 특별실무팀(태스크포스)까지 구성했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김만복 원장은 “대선이 있는 올해는 국정원 변화의 진정성을 재확인해줄 수 있는 기회로, 탈정치ㆍ탈권력 원칙을 더욱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취임사 등을 통해서다. 그는 10일의 국정원 창설 46주년 기념식에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 자세는 필연적으로 진실된 정보 보고와 정치 중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 개혁은 먼 길이다. 일반 정부 부처 개혁보다 정보기관 개혁이 더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첫 단추가 끼워졌을 뿐이다. 신기남 국회 정보위원장은 “정치적 권력 남용이 없어지고, 권위주의적 체질이 바뀐 부분은 평가할 만하다”고 언급한 뒤 “1ㆍ2ㆍ3차장으로 나뉘어진 조직을 정보수집ㆍ분석 등 기능별로 재편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건국대 법대 이계수 교수는 “국정원의 정보분석 대상을 해외 정보에 한정해야 한다”며 “권력화의 부작용을 낳는 대공 수사권의 폐지”를 주장했다. 반면 연세대 정영철 교수는 “국정원에 수사권을 존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정원의 역할을 축소하고 약화시키는 쪽으로의 개혁이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사권 폐지 문제는 앞으로도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능력 본위의 인사제도 정착도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97년 대선 후 국정원 고위 간부들의 신상이 상세히 적힌 이른바 ‘살생부(殺生簿)’가 나돌았다. 이는 국정원 내에서 벌어진 영ㆍ호남 간 인사 갈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지연과 학연의 굴레, 실력자 줄대기에서 벗어날 때 직원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정보는 왜곡되지 않는다. 김 원장은 “국정원은 국가 안보와 국익 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국가의 미래, 국민의 생명, 국익과 직결된 정보를 책임지는 국가 정보의 허브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한다. 국정원이 오욕의 과거를 훌훌 털고 국민의 신뢰를 반석에 올려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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