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로 CIA 신화 붕괴 정보 통합 문화혁명 나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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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02면

9ㆍ11 테러 반년 전엔…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이 2001년 3월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중앙정보국(CIA ) 본부를 방문해 CIA 로고 위에서 조지테닛 국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시의 CIA 방문 6개월 만에 9ㆍ11 테러가 일어나 CIA는 십자포화를 맞았다. 테닛 국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시의 CIA 방문 6개월 만에 9ㆍ11 테러가 일어나 CIA는 십자포화를 맞았다. 중앙포토

“경기는 내일 시작된다.” “내일이 행동 개시일이다(Tomorrow is Zero Hour).” 2001년 9월 10일. 미 국가안전보장국(NSA)은 테러단체 알카에다 요원 2명의 아랍어 통화를 감청했다. NSA는 전 세계적인 도ㆍ감청 시스템 에셜론(ECHELON)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정보기관. 그러나 NSA가 이를 영어로 푼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알카에다가 미국을 상대로 9·11 동시다발 테러를 감행한 후였다. 아랍어에 능통한 인력 부족 때문이었다. 훗날 미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1999년에도 NSA는 9ㆍ11테러 실행범 2명과 알카에다의 통화를 감청했다. 그러나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에 전하지 않았다.(『CIA 실패의 연구』, 오치아이 고타로)

60년 만의 대수술, 美 정보공동체

CIA는 어떻게 했을까. 9ㆍ11테러 두 달 전인 7월 10일. 조지 테닛 국장은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알카에다 공격 가능성을 알렸다. 8월 6일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오사마 빈 라덴 미국 내 공격 결심’이란 제목의 일일정보브리핑(PDB)을 했다(‘9ㆍ11위원회’ 보고서). 그러나 CIA는 알카에다 공격의 결정적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다. 단편적 정보의 점들은 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변죽만 울린 셈이었다. CIA는 10년간에 걸친 알카에다와의 전쟁에서 완패했다. “우리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는 CIA의 오만은 산산조각 났다. CIA는 장님이요, NSA는 귀머거리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네오콘인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은 지난달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CIA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부상과 그것이 미국에 주는 위험을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깨우쳐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 하나의 정보 실패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문제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2003년 3월 이라크를 공격한 명분이었다. 2002년 10월 1일. 테닛 국장은 해외정보위원회를 주재했다. 국가정보평가서(NIE)에 관여하는 모든 정보기관장이 참석했다. CIA는 92쪽의 극비문서 NIE의 ‘주요 판단사항’ 항목에 아무런 유보 없이 ‘이라크는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적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보고서는 이라크가 겨자가스ㆍ사린가스 등의 생산을 재개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노력에 대해 우리는 일부분만 알고 있다’고 했다.(『공격계획』, 밥 우드워드) 정보기관 특유의 빠져나갈 구멍 만들기다. 이 정보 평가는 다음날 상원 정보위원회에 보고됐다. 하원은 10월 10일, 상원은 다음 날 이라크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해 12월 21일. 테닛 국장과 존 매클로플린 부국장이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에게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현황을 보고하러 백악관에 갔다. 다음은 지난해 9월 10일 체니 부통령이 NBC 방송에 출연해 밝힌 당시 상황. “부시 대통령이 ‘조지, 사담(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대량살상무기는 어떤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테닛 국장은 ‘그것은 슬램 덩크(Slam Dunkㆍ덩크슛처럼 확실하다)입니다. 대통령, 그것은 슬램 덩크입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었고, 두고두고 국내의 비판 여론에 시달렸다. ‘슬램 덩크’는 CIA의 이라크 정보 실패를 상징하는 용어가 됐다. 테닛은 최근 낸 자서전 『폭풍의 한가운데에서』를 통해 체니 부통령이 자신의 발언을 제멋대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CIA의 실패는 냉전이 붕괴한 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적’을 잃어버렸다. 47년 발족한 CIA의 표적은 소련이었다. 대소련과 동유럽 공작이 전체 예산과 인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91년 12월 러시아 정보기관장이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도청계획과 그곳에 부착된 도청기를 CIA에 건네주면서 첩보전에서의 냉전도 일단락됐다. 클린턴 행정부의 제임스 울시 CIA국장은 “CIA는 40년 동안 용(소련)과 싸워왔지만 지금은 무수한 독사(테러 등 새 위협)를 상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CIA는 ‘잃어버린 10년’을 맞았다.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는 냉전기의 군사비 삭감에서 생긴 예산을 국민 복지로 돌리는 ‘평화의 배당’을 기치로 내걸었다. CIA 예산은 줄어들었고, 베테랑 공작원들도 하나 둘씩 물러났다. 클린턴 대통령도 정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울시 국장은 2년 동안의 재임기간 중 한 번도 클린턴과 독대하지 못했다. 여기에 CIA는 관료조직화됐고, 동맥경화를 일으켰다. 1997년. 경보음은 내부에서 나왔다. 국방정보국(DIA) 분석관 러스 트래버스가 ‘도래할 정보 실패’란 논문을 냈다. 내용은 통렬했다. “우리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고, 정보 실패는 뻔하다(guaranted).” 2001년의 관점에서 쓴 그의 통찰은 적중했다. 9ㆍ11테러 한달 전에는 전직 중동 담당 CIA 공작원 로이엘 게레흐트의 월간지 기고문이 눈길을 끌었다. “미국의 반(反)테러 계획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다.”(The Atlantic Monthly). 9ㆍ11테러는 예견된 참사였다.
 
‘집단 사고’ 오류 견제
2004년 12월 8일. 미 상원은 ‘정보개혁 및 테러방지법’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골자는 국가정보국(ODNI)과 국가반테러센터(NCTC)의 창설. 9ㆍ11 테러를 조사한 초당파 ‘9ㆍ11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정보국장은 CIA를 비롯한 16개 정보기관(정보공동체ㆍIC)의 수반으로 안보 관련 정보를 감독ㆍ조정하는 자리다. <3면 표 참조> 동시에 전체 정보 예산을 편성한다. ODNI 신설은 정보기관에서 60년만의 큰 변화다. 91년 이래 연방위원회 등이 16번에 걸쳐 정보기관 개혁을 제언했지만 기본적 골격은 바뀌지 않았다.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은 “1947년의 국가안전보장법 제정이 제2의 진주만 기습사건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조치는 또 다른 9ㆍ11테러를 막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ODNI 신설 이래 미국의 정보공동체에 ‘문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첫째는 정보기관 간 벽 허물기다. 기관 간 영역 싸움은 미 정보공동체의 고질적 병폐였다. 주요 대립축은 CIA-국방부 산하 정보기관, CIA-FBI. ODNI가 생겨나기 전 정보공동체의 수장은 CIA 국장이었지만 조정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다. 각 기관들은 미국 내에서도 정보게임을 벌였던 것이다. 정보기관장들이 하나같이 ‘통합’을 화두로 삼는 데는 반성이 녹아있는 듯하다. 마이클 헤이든 CIA국장은 “우리의 공통 문화는 하나의 기관과 하나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CIA 홈페이지).

그 하나가 보안통제의 완화다. 한 정보기관이 생산한 보고서에 ‘ORCON(Originator Controlled·비밀생산자 통제)’ 도장이 찍혀 있으면 비밀이 해제될 때까지 다른 기관은 볼 수 없었다. NSA에서 최고비밀 취급 자격을 갖고 있는 20년 된 베테랑이 CIA로 옮겨 새 인가를 받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보안이 기관별로 통제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해외동맹에 대한 정보 공개다. 영국ㆍ캐나다ㆍ호주는 무인정찰기가 보내오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외부 전문가에 대한 문턱 낮추기도 주목할 만하다. 정보기관 특유의 ‘집단 사고’ 오류를 막기 위해서다.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졌을 것이라는 미국 정보기관들의 집단사고는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ODNI가 설치한 것이 공개정보원센터다. 정보 분석관들이 기업과 학계의 전문가를 불러 정보 오류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있다. 변화는 대통령 일일정보 보고서(PDB)에서도 나타났다. 국가정보국장이 보고하는 PDB에 일반에 공개된 정보도 들어가고 있다. 비율은 15% 정도라고 한다.

정보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도 활발하다. 한 해에 16개 정보기관이 생산하는 분석 보고서는 약 5만 건. 그렇다고 모두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국가디지털정보도서관을 설립했다. 정보가 정치적으로 조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옴부즈맨 제도를 만든 것도 눈길을 끈다. CIA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보유 정보 실패는 정보기관이 정치에 휘둘린 탓이라는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제도 만만찮다는 지적들이다. 인적 정보능력을 높이는 것은 발등의 불이다. 9ㆍ11테러 발생 당시 CIA의 약 1만6000명 가운데 아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요원은 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국가정보국장의 권한도 모호하다. 정보공동체의 수장이지만 국방부가 전체 정보 예산의 80%를 차지하는 산하 정보기관을 통제하도록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기관의 변화에 대한 저항과 조직보호 본능은 강하다. “우리는 아직 정보공동체로의 변환(transformation)을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 2003년까지 CIA 부본부장을 지낸 조앤 뎀프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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