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최고의 영화 마니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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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13면

전에 내가 다녔던 비디오가게 주인의 이야기이다. 사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한눈에 봐도 우락부락한 인상에 팔뚝에는 문신과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선명했지만 나름대로 웃는 모습이 순박한 사내였다. 아마도 뒤늦게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건달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평 안 되는 가게에 보유한 비디오 개수도 얼마 안 돼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좀처럼 가지 않았는데, 언젠가 밤늦게 귀가하다 비디오를 한 편 빌리려고 들렀더니 그가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소설가 천명관의 시네마 노트

딱히 눈에 띄는 비디오가 없어 뭘 빌릴까 망설이는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비디오를 한 편 권했다. 자신은 손님들의 취향을 존중해서 좀처럼 비디오를 권해주지 않지만 그것만큼은 워낙 특별한 영화라 나에게 꼭 권해주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기껏 16㎜ 국산 에로영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비디오는 케빈 베이컨 주연의 ‘불가사리’라는 B급 괴수영화였다. 특별히 끌리진 않았지만 딱히 볼 것도 없었고 ‘케빈 베이컨 게임’도 떠올라서 별 생각 없이 그가 권하는 대로 비디오를 빌려왔다.

영화는 나름대로 볼 만했다. 모래 밑을 기어 다니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케빈 베이컨의 열연(?)도 눈부셨고 싸구려 괴수영화 특유의 돌발적인 재미(?)를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나는 그 비디오가게 주인과 친해졌고 이후 그는 아무런 격의 없이 이런저런 영화를 나에게 권해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B급 괴수영화의 대가였다. 그가 권해주는 영화에는 언제나 괴수가 나오는데 그것도 주로 곤충이 진화해서 거대한 괴물로 변해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대부분 인간이 잘못 버린 유기화합물 때문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는 타르콥스키니 키에슬로프스키니 하는 ‘스키’들의 이름도 전혀 들은 바가 없었고, 예술영화관에도 한 번 가본 적 없었지만 나는 곧 그를 최고의 영화 마니아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영화 마니아들에게 베스트 목록을 뽑아보라면 대개는 남들이 잘 모르는 동유럽 영화나 제3세계 영화 한두 편에 천편일률적인 목록이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목록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 당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게다가 그 영화들을 어찌나 열심히 봤는지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져서 잘 나오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 영화에서 괴수의 생김새가 어땠는지, 어떤 무기를 사용하고 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희생자가 어떻게 끔찍하게 죽었는지에 대해 놀라울 만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감독이나 배우 이름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괴수만 나온다고 그가 모두 좋아한 것은 아니다. 괴수가 현실처럼 생생한 느낌을 주어야 하고, 반드시 뭔가 뾰족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가져야만 했다. 그것은 그만의 특별한 감식안이 필요한 것이어서 나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내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를 권했을 때 그는 영화를 보고 나서 뜻밖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괴수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파리는 무섭지가 않더군요.”
하긴 파리가 아무리 커진들 뭘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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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씨는 충무로에서 오랜 낭인생활 끝에 장편소설 ‘고래’로등단한 뒤 소설과 연극, 영화와 드라마 등 온갖 이야기 예술에 관심이 많아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단 소설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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