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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한 장의 디자인이 회사를 바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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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04면

1.직사각형 평범한 카드는 현대카드에 없다. 이집트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카드, 한쪽 모서리를 둥글게한 프리폼 카드 등 개성 넘치는 카드 디자인에 억대 예산을 들인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에는 달과 별이 뜬다. 바다와 강이 있고 숲과 사막이 있다. 비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며 이슬이 내린다.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진다. 기막힌 디자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형태와 구조를 디자인한 ‘신’은 대단한 디자이너다. 그를 닮게 디자인된 인간은 지구상에서 디자인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디자인은 한마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중요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디자인 평론가 존 헤스켓은 “언어와 함께 디자인은 인간을 현재와 같이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2004년 1월 알파벳 26자에 포커스를 맞춘 TV 광고를 선보여 현대카드의 독창적인 기업 아이덴티티를 알렸다.

훌륭한 영국 집사 ‘디자인’
자유무역과 세계화에 맞서 한층 치열해지고 있는 오늘의 기업환경에서 디자인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두드러져서도 곤란하다. 독일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좋은 디자인이란 ‘훌륭한 영국 집사’와 같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즉, 필요할 때는 조용하고 효과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눈에 띄지 않게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진 최신 디자인 흐름은 ‘경험’과 ‘재미’에 대한 강조다. ‘경험 설계자(experience architect)’라는 새 직업까지 생겼다. 각 나라나 문화권ㆍ기업이 지닌 ‘정체성’의 문제도 디자인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를테면 외국 디자인 전문가에게 한국의 김치냉장고는 한국 음식문화, 독특한 정체성의 상황이 낳은 디자인 산물로 주목받는다. 1980년대 초 ‘사과’ 이미지 하나로 세계 컴퓨터 업계를 놀라게 한 애플 또한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으로 급성장한 예로 꼽힌다. 무지개색 사과 로고로 똘똘 뭉친 애플은 기업의 모든 면에 디자인을 경쟁 요소로 투입해 당시까지 컴퓨터 업계의 최강자였던 IBM을 놀라게 했다.

2.현대카드의 브랜드숍 3.전 사원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누구나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면 바로 구입해 비치한다. 4.사무실 내 회의실은 복도와 마주보는 벽을 유리로 만들어 누가 회의를 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5.현대 카드 본사 여의도 사옥 벽에 붙어있는 타이포그라피. 6.직원과 대표를 비롯한 간부가 각기 재미난 분장을 하고 찍은 사진이 인테리어로 장식된 서울 여의도 본사의 카페테리아(식당).

디자인은 기업 회생의 힘
디자인은 과연 기업 생존에 필요한 핵심 경쟁 요소일까. 미국 3대 자동차업체 가운데 규모 면에서 꼴찌였던 크라이슬러가 대표적 사례다. 90년대 초 위기에 몰렸던 ‘크라이슬러’는 디트로이트에서 생산한 혁신적인 새로운 컨셉트의 자동차를 내놓으며 위험한 상황에까지 내몰렸던 위기에서 벗어났다. 당시 디자인 담당 부사장이었던 토머스 게일이 새로운 디자인 개념을 전략으로 내세운 덕이었다. 게일 부사장은 과감하게 기업의 의사결정 단계에서 디자인을 강조했고, 위기 극복 프로그램에서 디자인은 1등 공신 구실을 했다.
현대카드(대표 정태영)는 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크라이슬러’라 할 만하다. 2003년 9000억원의 적자를 내던 카드업계의 후발주자, 모회사인 현대자동차의 ‘애물단지’가 전통의 명가 카드사들을 제치고 돌풍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 상황 탈출의 동력은 ‘디자인의 힘’, 그 지휘자는 디자인을 기업전략으로 내세운 정태영 대표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정 대표의 획기적 발상 전환은 현대카드가 내세운 한마디 “믿거나 말거나”처럼 지금 한국의 기업문화 현장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갑 속에서 반짝이는 카드
일본 ‘월드 브랜딩 커미티’는 전 세계의 우수한 브랜드를 조사해 유행하는 브랜딩과 아이덴티티 흐름을 살피는 보고서를 발간하는 전문기관이다. 이 ‘월드 브랜딩 커미티’가 낸 『월드 브랜딩(World Branding)』 2006년 판에 현대카드가 우수 사례로 소개됐다. ‘몇 년 전 업계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던 현대카드는 드라마틱한 급성장을 하고 있다’는 놀라움을 표시한 보고서는 현대카드의 탄생과 성장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며 오늘의 급성장이 우연이나 재력으로 일군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현대카드는 지갑 속에서 눈에 띄는 식별력을 지닌다. 지갑을 열면 카드 홀더에 회사명 현대카드 인덱스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현대카드 뒤에 쓰인 ‘M’과 ‘S’ 등 알파벳은 카드의 종류를 표시, 여러 장의 현대카드를 갖고 있어도 사용하는 경우에 따라 카드를 바로 꺼내놓을 수 있게 했다.(…) 고객의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카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즉 현대카드만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제공하는 것에 따라 고객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카드를 선택하고 자신의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다양한 고객에게 다양한 가치를 제공하고 즐거운 인생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현대카드의 브랜드 가치다.”
이 보고서는 특히 현대카드의 기업 아이덴티티(CI) 일신에 높은 점수를 줬다. 신선한 회사 로고 타입과 오리지널 서체, 톤과 매너를 맞춘 핵심 요소를 새롭게 설정하고 이를 각 지점 및 신용카드ㆍ포스터ㆍ텔레비전 CM 등에 일관되게 반영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또 현대카드의 브랜드 퍼스낼러티 중 하나인 ‘혁신(Innovation)’을 평가했다. 혁신적인 기업을 만들기 위해 사무실 집기 같은 작은 것부터 변화를 일군 정태영 대표의 열린 마음에 주목한다.
정 대표는 이 보고서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브랜드는 자기 표현입니다. 브랜드 가치는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특정한 말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에서 현대카드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파격의 원칙주의자’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원칙을 깨는 것이 파격이지만, 파격이 강력한 리더십을 만나면 원칙이 된다. 현대차 그룹에서 ‘노(NO) 타이’는 파격이다. 정태영(47ㆍ사진) 현대카드 사장이 넥타이를 매지 않자 전 직원이 ‘노타이 원칙’을 따르게 됐다. 현대카드 급성장의 비결도 파격으로 새 원칙을 세운 그의 리더십에 있다. 2002년 2%도 안 되던 현대카드의 점유율은 정 사장이 맡은 지 3년 만에 13%대로 뛰었다. 6000억원대 적자 회사가 3000억원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했고, 회원도 600만 명을 돌파했다. 광고 카피처럼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자투성이 현대카드에 부임해 사업보고를 받았을 때 정 사장은 오히려 희망을 보았다. 보고대로라면 도무지 경쟁사와 차별화된 것이 없었다. “글로벌 카드사들과 달리 국내 카드사들은 수익모델이 다 똑같더군요.”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대카드는 현대ㆍ기아차로부터 안정적인 고객층을 갖고도 적자에 허덕였던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 통용되던 ‘카드의 원칙’을 깼다. “카드 디자인 비용은 30만원이면 충분했죠.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이너를 기용해 억대를 쏟아 부었습니다.” 연회비 100만원짜리 ‘블랙카드’나 지폐 디자인 기법을 카드에 적용한 ‘알파벳 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해 카드 혁명을 일으켰다. ‘미니 M카드’는 1970년대 미니스커트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카드 디자인은 시작일 뿐이다. 현대카드는 이제 카드사인지 디자인 회사인지도 모호해졌다.
이를 위해 그는 ‘위기 때 긴축해야 한다’는 통념도 깼다. “수천억원대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 경비를 줄여 봐야 얼마나 더 나아졌겠습니까.” 감원도 감봉도 없었다. 거꾸로 보너스를 지급했다. “금융은 사람이 자산인데 긴축했다면 인재들부터 짐을 쌌을 겁니다.”
오히려 금융과 무관한 인력을 대거 영입했다. 각 분야 컨설턴트ㆍ연구원을 비롯해 디자이너, 레저ㆍ스포츠 전문가, 심지어 호텔리어도 있다. “우리의 목표는 비(非)금융인력 비중을 50%까지 높이는 것입니다. 기존 금융사의 틀을 깨려면 이들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니까요.” 디자인팀을 사내에 두고 있지만 이는 외부 협력업체로 다른 회사의 디자인 일도 하고 있다. “그래야 감각이 무뎌지지 않습니다. 우리 일만 하면 정체되죠.”
그의 파격이 사내에서 적잖은 반발에 부딪혔을 법도 하지만 그는 설득하지 않았다. “설득할 만큼 한가한 경영상황이 아니었죠. 적어도 내 앞에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설득보다 실행이 우선이었다. “그 상황에서 전통을 계승해 매진하자고 말해야 했겠습니까?”
‘디자인의 승리’란 평가는 그에게 달갑지 않다. “카드 디자인 하나 잘했다고 카드사가 기사회생했겠습니까.” 그가 디자인에 주목한 것은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다. “경쟁사가 겉모습은 베껴도 속에 담겨 있는 철학과 가치까지 따라 할 수 없죠. 디자인뿐 아니라 상품ㆍ마케팅 등 경영 전반을 총체적이고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죠.” ‘디자인 경영’이 아니라 ‘경영 디자인’인 셈이다. 성장의 촉매가 된 GE캐피탈과의 제휴도 그런 가치 추구를 통해 가능했다. 이임광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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