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저는 본디 울화 증세 … 열은 높고 미칠 듯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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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1753~54년께(18~19세),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내용.

"저는 본디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오늘은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은 우울증을 씻어내는 처방을 잘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보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일이 번잡하니 미안하지만 조용히 보내주십시오."


10대 시절 사도세자(1735~1762)의 답답한 심경을 고백한 편지 뭉치가 공개됐다. 서울대 권두환(국문학) 교수는 15일 학술발표회에서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보낸 편지 1첩 26책의 내용을 발표했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의 개인사는 부인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기술한 '한중록'에도 나타나지만 사도세자가 직접 쓴 편지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 때 뒤주에 갇혀 요절했다.

편지엔 사도세자가 젊은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았고, 아버지 영조와 갈등을 빚으며 자신의 처지를 고민했던 인간적 모습이 담겨 있다.

사도세자는 편지에서 "제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됐습니다만 아직 한 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1749년)고 썼다. 권 교수는 "부왕(父王) 영조가 아버지의 능에 행차하면서 세자의 동참을 허락하지 않자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불안감을 느낀 것"이라고 설명했다.

7년 뒤(1756년)에 보낸 편지에는 "저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어 다만 마음을 어루만지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지도책과 병서를 보내달라고 장인에게 부탁한다. 권 교수는 "이 편지 한 편에 우울증, 궁중에 의지할 인물이 없다는 점, 정신이 온전할 때는 책을 보며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했던 모습이 다양하게 드러나 있다"고 분석했다.

경희대 김남일(한의학) 교수는 "울화.울증은 스트레스가 쌓여 기가 통하지 않는 상태로 우울증.정신병에 해당하며 2~3년 새 병이 깊어진 걸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권 교수는 일본 도쿄대에서 장조(莊祖.사도세자).정조의 편지 11첩의 사진 복사본을 발견했다. 원본은 현재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으며, 권 교수가 입수한 사진복사본은 도쿄대 동양사학과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교수가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 오다 퇴직 후 기증한 것이다. 서울대 김인걸(국사학) 교수는 "한중록의 일부 내용을 뒷받침하며 사도세자의 심리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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