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실감/문창극 워싱턴특파원(특파원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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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금권도 관권도 안통하는 선거풍토/멋진 정권교체는 미 국민들의 역량
지난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일어났을때 일이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로스앤젤레스를 방문,코리아 타운에도 들러 우리교민들과 1시간이상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백악관 기자단 일행과 그 자리에 있으면서 오가는 질문과 답변속에 한국교민과 미국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시각 차이를 발견했다.
한 우리 교민대표가 『한국민이 이번에 이렇게 당한 것은 한국교민을 얕잡아보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함께 『그렇기 때문에 부시대통령이 각종 공직에 한국계 인사를 많이 등용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요청에 대해 부시대통령은 『각종 공직은 투표로 결정되니 선거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는 설명과 함께 『권력은 대통령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덧붙이고 넘어갔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황금의 손을 가진 것으로 보아온 우리와 하원선거에서 낙방도 해보고 또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된 부시의 권력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달랐다. 사실 권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에서 미국대통령만큼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의 명령 한마디로 전세계가 전쟁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있고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될 수 있다.
한국의 정치만을 보아왔던 기자는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도 한국적인 시각속에서 해석하려 했다.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계속 뒤지고 있다는 여론조사를 보고도 『그 막강하다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시골 주지사에게 설마 떨어질까』라는 생각과 함께 『그 엄청난 힘을 배경으로 분명히 역전시킬 묘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흔히 사회현상 가운데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권력자들이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음모를 하여 그러한 결과가 빚어졌다고 하는 소위 「음모설이론(Conspiracy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을 구태여 내걸지 않아도 권력자들이 밀실에서 만들어낸 결정을 무수히 보아왔고,그것이 타당성여부를 떠나 시행되는 것을 수 없이 경험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명천지 요즈음에도 한국에서는 음모를 바탕으로한 이야기여야만 주목을 받는다. 『최후의 쿠데타』니 『대권무림』이니 하는 황당하기만한 얘기로 가득찬 정치소설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실제 권력의 주인인 국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몇사람의 음모와 농간이 권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발상이며,국민들도 이를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듯 하다. 기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부시의 권력방망이의 효과,아니 미국권력자들의 음모가 어떻게 전개될까 기다렸다.
『이라크와 다시 전쟁을 하여 인기를 높일 수 있다더라』『국민이 깜짝 놀랄일을 꾸며 만회할 수 있다』는 등의 상상의 나래를 폈다.
결국 그러한 음모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시는 그저 선거에서 패배했고 다음 대통령직은 빌 클린턴으로 넘어갔다.
부시의 권력이 재집권을 창출하는데는 무력했다. 그런 것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기자가 오히려 부끄러웠다.
돈의 역할에 대한 과신도 무너졌다.
억만장자인 로스 페로가 나타나 수천만달러를 쏟아부어 중요 TV의 광고시간을 사서 바람을 일으킬 때 만만치가 않았다.
그는 불과 몇주간에 6천만달러를 사용해 클린턴이나 부시가 전 선거운동기간에 쓴 돈보다 더 많이 썼다는 얘기도 있다.
벌써 미국에서는 이러한 억만장자들이 계속 나타나 비록 자기돈이라고는 하지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해 매스미디어를 장악할 경우 민주주의 기반을 무너뜨린다는 비판과 함께 이번 의회에서 정당후보처럼 개인후보도 선거자금 사용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몇주간 퍼부은 수천만달러의 돈도 미국 국민들의 선택을 좌우할 수 없었다.
미국 국민들이 대통령을 고르는데 소용없고,돈도 소용없었다.
그러한 국민을 알기 때문에 권력자는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택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있다.
미국이 멋진 정권교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국 국민의 역량이었다.
우리의 대통령선거도 얼마남지 않았다.
우리도 이제는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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