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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시마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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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웬 호박이야?"

일본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 사이에 떠있는 인구 3470명의 자그마한 시골 섬 나오시마(直島). 한 달여 전 페리로 도착한 이 섬의 항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대형 호박'이었다. 높이 4m, 직경 7m의 '빨간 호박(Red Pumpkin)'. 창피한 이야기지만 알고 보니 세계적 예술가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의 '작품'이었다.

교통표지판으로 쓰는 삼각 고깔, 거대한 쓰레기통, 나무 보트 등도 모두 이 섬에서는 작품으로 변해 있었다. '섬의 작품화'라고나 할까.

또 하나의 충격.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 식당에 들어서니 웬 외국인투성이(나도 외국인이지만…). 온갖 국적의 언어가 들려왔다. 섬 둘레가 16㎞에 불과한, 극히 평범한 풍광의 이 외진 섬을 보고자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호텔 예약은 3개월 이상 밀려 있다고 한다. 5년 전만 해도 2만~3만 명에 불과하던 관광객 수는 지난해 19만 명을 넘어섰다. 섬 인구의 55배나 된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외국인이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 섬은 영화 007시리즈의 촬영 후보지로도 떠오르고 있다.

주민들의 솔직함과 순박함 때문에 이름에 곧을 직(直)자가 붙었다는 이 섬이 '뜨는' 이유는 뭘까-.

실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18년에 걸친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결실이었다. 일본 최대의 출판.교육사업 그룹인 '베네세'의 2대에 걸친 헌신적 투자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나오시마가 가능했다. 1989년 국제 어린이캠프장을 이곳에 설치한 뒤 92년에는 현대 미술품 전시관과 숙박 기능을 복합한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을 만들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를 끌어들인 베네세는 2004년에는 건물을 땅속에 묻은 '지중 미술관'을 선보였다. 시골 섬 마을을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아트(예술)의 섬'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오시마의 기적'이 미술관 몇 개 짓는다고 가능했던 일일까-.

"턱도 없는 이야기. 우리라고 외지 사람이 뭐가 좋겠어. 하지만 우리가 섬 발전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고 일할 기회도 주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더 있나."(다나카 하루키.76.관광안내 자원봉사자)

베네세는 98년부터 나오시마에 내버려지다시피 있던 200년 지난 목조 민가들을 통째로 미술작품으로 복원했다. 이름하여 '집 프로젝트'. 그 안에 섬 주민들이 직접 참여한 각종 예술작품을 설치했다. 전통과 현대미술이 동시에 숨 쉬게 하는 주민 참여형 섬 개발이었다. 집 밖을 나서지 않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너도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길을 청소하고 현관 앞에 꽃을 장식하는 운동도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섬 전체의 발상 전환이었다.

나오시마의 '창조적 발상'은 이뿐 아니다. 2003년에는 5㎞ 떨어진 인근 데시마(豊島) 섬에서 나오는 산업 폐기물의 처리장 건설을 전격 수용했다. 주변의 다른 지자체들은 결사 반대했다. 나오시마는 달랐다. 첫눈에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예술'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발상 덕분인지 나오시마의 1인당 평균소득은 올 3월 발표에서 가가와(香川)현 내 35개 지자체 중 1위로 올라섰다.

한국의 사정을 보자. 관광수입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한번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은 재방문을 주저한다. 갈 곳이 없단다. 그러나 왜 없겠는가.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인 홍도, 그리고 진도와 보길도의 풍광이 어찌 나오시마만 못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문제는 개발 의지다. 정부의 측면지원으론 한계가 있다. 한국의 기업인들이여, 나오시마를 찾아 화끈하고 창조적인 베네세의 마인드를 배워 가길 바란다. 그래서 '홍도의 기적' '보길도의 기적'을 일으켜 보자.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