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씨의 선택(송진혁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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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왜 재벌들로 자꾸 정치에 뛰어들려 하는가. 정주영씨에 이어 김우중씨 출마설도 대선정국은 더욱 뒤숭숭하고 선거판도는 혼미를 더하고 있다. 김씨의 출마설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50대 영웅」이 나섰다고 반기는 분위기는 없다. 재벌들의 잇단 정치참여욕구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당혹감만 있을 뿐이다.
○정부에 겁안내는 풍토
지금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총수들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현상은 최소한 두가지 사실을 말해주는 것같다. 하나는 대기업들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경제력이 커진 것은 물론 발언권,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졌다.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정부와 정치권은 민주화과정에서 연이어 죽을 쑤고,위신이 깎이고,권위가 떨어졌다. 그에 따라 대기업들이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겁을 덜 내게되고 만만히 보게 된 것을 숨길 수 없다. 최근 재계가 정부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을 토로하고 「실명제를 하자」「돈 안드는 선거 방안을 내놓아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을 봐도 재계의 입장강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또 한가지는 기성 정치권과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불안인 것 같다. 이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겨도 되겠는가,앞으로 내 기업·내 재산이 잘 보호되겠는가,내가 저 사람들만 못한게 뭔가…하는 생각들이 재벌들에게 깔려있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정주영씨가 두 김씨를 비하하는 발언이나 기성 정치인들을 대하는 언동을 보면 이 점은 확연하다. 이렇게 볼때 재벌의 정치참여는 상당부분 정부와 정치권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다고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정치에 뛰어 들어도 괜찮은 것인가. 우선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걱정은 이러다가 이 나라가 재벌에 의해 3분천하,5분천하의 판이 돼버리는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현대·대우가 각기 상당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면 삼성·럭키·쌍용인들 가만 있겠는가. 이들 역시 정치적 보호막과 영향력의 필요성때문에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추구하지 않겠는가. 설사 총수가 직접 출마하거나 정당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특정 정치세력과 연대,제휴관계를 모색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재벌마다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그중에서 집권세력이 나오고 그 재벌이 재계의 패권을 잡고 하는 사태가 돼서야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정경유착이 아니라 정경일체·재벌공화국이 될게 뻔하다.
○다른 재벌 가만 있겠나
또 한가지 생각할 일은 도덕성과 책임감의 문제다. 대기업이 경제를 일으키고 고용을 창출하는 등 막대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대우가 당대에 그만한 부를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손에 얼룩없이 청부를 이룩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권력과의 유착·특혜·권모술수 등 공개하기 어려운 수많은 곡절과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외곬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생리인데 그런 기업의 총수가 권력을 잡는다고 갑자기 공익구현이란 정치의 목표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인가.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대부분 거대한 빚을 지고 있다. 대우의 경우 자기자본 2조5천억원에 빚어 7조6천억원이라 한다. 이 거대한 빚이 대해서는 김씨가 무한책임감을 느껴야 옳을 것이다. 대기업은 자금력외에도 전국적 조직과 풍부한 인력,뛰어난 기동력과 기획력을 갖고 있어 정치세력화의 여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기업총수가 이런 호조건을 이용해 정치발판으로만 삼고 거대한 빚은 나몰라라 하고 몸을 뺀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정주영씨는 개인재산이 3조원이라고 하고,김우중씨도 큰 부자일게 틀림없지만 엄밀히 말해 어디까지가 기업소유고 어디까지가 개인소유일까.
어느 사회든 본령을 지키고 자기분야에서 업적을 쌓아가는 사람들로 사회가 지탱되고 발전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기업에 있어 그런 인간상이 절실히 필요하다. 기업의 대외경쟁력에 지금 국운이 걸린 판이다. 현대·대우쯤 되면 세계 일류의 기업,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향해야 할 우리나라의 간판 기업들이고 정주영·김우중씨는 현대와 대우에 무한책임을 진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고 기업을 떠난다면 기업쪽의 자신들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50대역할」 따로 있을 것
이처럼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때 김우중씨가 일단 출마하지 않기로 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김우중씨는 현실정치에 대한 불신·불만이 크고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들리는데 김씨쯤 되는 영향력과 발언권이라면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정치의욕을 살릴 길은 있다고 본다. 가령 양심적·개혁적 정치세력을 지원하고 시민단체를 후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소에 인재를 끌어모아 권위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겠고 재계단체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른바 「50대역할론」은 좋은 주장이고 상당부분 사리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치에 뛰어들어 「50대영웅」이 되기보다는 그의 「50대의 역할」은 아직은 대우에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재벌정치가는 정주영씨 한 사람으로도 이미 너무 많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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