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가수 이현우와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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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화창한 날 오후 40대 남자 둘이 만나는 게 궁상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선데이 브런치'를 즐길 여유가 있다는 것은 독신만의 특권이 아닐지…. 독신주의인 듯 아닌 듯 모호한 경계선에서 생활하고 있는 두 남자는 음악에서만은 확실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다. 음악계의 소문난 주당이라는 것도 둘의 공통점이다.

'김광민+이현우'라는 조합이 왠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MBC '수요예술무대' 덕분이다. 프로그램은 3년 전 없어졌으나 두 MC의 어눌하면서 정감 어린 진행은 아직도 많은 이의 기억에 남아 있다. 온갖 자막과 말 풍선으로 도배된 요즘 프로그램들 속에서 가끔 '수요예술무대'가 그리운 것은 이들 둘이 만든 '여백' 때문이 아닐까.

#많이 비우니까 채워지더라

둘의 대화도 '여백의 미'를 소재로 시작됐다. "현우야, 이 집 인테리어 참 심플하지 않니? 이런 인테리어가 부담 없고 질리지 않아."(광민)

"맞아. 예전 카페 인테리어를 보면 뭐든 꽉 채우려 했는데, 요즘은 많이 비워서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게 추세인 것 같아."(현우)

많이 비우는 것. 요즘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의 모토이기도 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최근 앨범을 내놓은 이들. 서로의 음악에 대한 느낌을 주고받았다. "형의 이번 5집 앨범 '시간여행'은 군더더기 없는 앨범이야. 공간을 많이 둔 것이 느껴지고, 리듬과 연주가 심플해. 김광민의 음악이 변화를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현우)

"요즘 들어 비우는 게 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걸 이번 앨범에 반영했지."(광민)

"나도 예전에는 창법도 질러대고, 공간이 생기면 뭐든 집어넣으려 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비워둔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게 내공 쌓인 사람들의 작업이구나 하고 깨달았지."(현우)

"네 10집 앨범 '하트 블러섬(Heart Blossom)'을 들어보니 너 자신이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에서 노래를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전해지더군. 자기 마음이 우러나는 게 음악이야."(광민)

#김광민.이현우 함께 앨범 낸다

8년간 함께 '수요예술무대'를 진행하며 종종 함께 음악 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이들. 김광민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이현우가 자신의 노래나 팝송.재즈를 불러 제법 음악의 궁합을 과시했다. 그때의 진한 여운 때문일까. 이들은 함께 다음 앨범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이르면 늦가을께 선보일 이들의 앨범은 어떤 색깔일까.

"형과 같이 작업하면 내 목소리가 격상될 것 같아. 기회가 되면 형과 재즈풍의 편안한 노래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뜻이 맞을 줄이야. 감춰졌던 형의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현우)

"내가 요즘도 록 음악 듣는 거 알지? 여러 가능성을 두고 작업해 보자. 이왕 하려면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것을 해봐야 하지 않겠니? 이러다가 아주 센 록 음악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하하." (광민)

#이현우의 새로운 도전

가수.연기자.DJ.사업가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온 이현우. 그가 이번에 뮤지컬에도 도전한다. 9일부터 두 달간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싱글즈'에 출연하는 것. "참, 바쁘게 산다. 그러다 몸이 버텨내겠니?"라는 김광민의 걱정 어린 말에 이현우가 다소 비장감 어린 말투로 답했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으면 금세 늙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어. 뮤지컬도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야.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의 열정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아. 순정파 로맨티스트 수현 역인데, 나와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아. 살면서 이렇게 혹독하게 연습해 본 적은 없었어. 노래와 연기는 물론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와인 한 병이 금세 동났다. 대화의 분위기도 점점 익어갔다.

"내가 먼저 회사에 음반을 내자고 조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를 클래시컬하고 심플하게 연주하니 꽤 괜찮더라고. 사실 이번 앨범에서 김광민 음악의 꼬리표인 '슬픔'과 헤어지고 싶었는데, 잘 모르겠어. 이번 공연(27일.LG아트센터)은 피아노 한 대 놓고 혼자서 하려고 해."(광민)

"형, 나도 많이 둥글둥글해졌어. 예전에는 어두운 기질 때문에 음악이 거칠고 공격적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바꾸려고 해.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음악도 바뀌었다고 할까? 요즘 등산을 하는데, 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면 내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돼. 그 전에는 불만과 욕심, 질투가 많았는데 지금은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현우)

"하긴, 지난번 프로그램 녹화할 때 네가 나한테 의자를 양보하는 걸 보며 '녀석, 많이 변했네'라는 생각을 했어. 하하하."(광민)

#떠밀려 하는 결혼은 싫다

문득 메뉴판을 보며, 김광민이 "맛은 있는데, 여기 꽤 비싸네"라고 말하자, 이현우 왈 "형. 이 정도 갖고 비싸다고 하면 어떡해. 분위기 있는 곳에서 여자에게 '작업'을 걸려면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난 여자들에게 밥도 많이 사고 술까지 사주는데 막상 소득이 없어. (ㅋㅋ)"(광민)

둘 간의 대화는 자연스레 사랑과 결혼에 대한 속 깊은 얘기로 이어졌다.

"나 몇 달 전 애인과 헤어진 거 알지? 워낙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혼자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산에도 다니고, 집에서도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 다른 사람과 오래 같이 있으면 답답해. '평생 너 좋은 것, 너 편한 것만 하며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핀잔을 들을 만해.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정말 결혼하고 싶어질 때 결혼할 거야. 단지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외롭다는 핑계로 떠밀려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현우)

"매년 나이를 먹을 때마다 '큰일 났다'는 위기감이 드는 게 사실이야. 그래서 여자 만나기가 더 힘든지도 몰라. 그리고 집안 간의 결합이니 뭐니 하는 우리의 결혼 시스템도 마음에 안 들어. 나도 정말 이 여자다 싶을 때 결혼할 거야. 너와 달리 나는 학교(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에 묶여 살다 보니, 교내에서 여자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하."(광민)

10년 넘게 형제처럼 지내 온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느낌을 가식 없이 표현했다.

"넌 한마디로 '폼생폼사'야. 연기도 그래.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네 인생 자체가 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광민)

"형은 늘 소년 같아. 음악뿐만 아니라 생각도 순수하거든. 그런데 음악 할 때는 광인(狂人)으로 변해. 무섭게 피아노 속으로 빨려 들어가잖아. 그래서 형은 양면성의 인간이야. (ㅋㅋ)"(현우)

식사를 마친 이현우가 자리를 정리하며 김광민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형, 뮤지컬 배우들이 마지막 공연 때 다들 운다고 하는데 나도 과연 눈물을 흘릴까?"

"내가 볼 때 너는 분명히 울 것 같다. 겉으론 '폼생폼사'해도 네 안에는 그런 정서가 있어. 그게 음악에도 묻어나지.'도시의 그늘'이랄까.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정서일지도 몰라."(광민)

글=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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