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Movie TV] 공형진 "나, 해냈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22면

'처음'은 늘 떨린다. 아니, 떨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호기심어린 눈길이 쏠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묻게 된다. 얼마나 떨리세요? 31일 개봉하는 코미디 영화 '동해물과 백두산이'(감독 안진우)에서 실수로 남한에 넘어온 북한 병사 림동해 역으로 연기 경력 14년 만에 첫 주연을 꿰찬 공형진(34). 그에게도 '처음'의 떨림이 없을 리 없을 터다.

"주연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어요. 이름이 주연이든 조연이든 전 늘 연기를 하고 있었는 걸요." 짐짓 딴전을 부리는 것 같다. 재차 물었다. "달라진 거요? 아, 처음으로 포스터를 찍었어요. 포스터는 주연 배우만 찍을 수 있으니까 늘 부러웠거든요.

'너 주연 한다며?'라고 전화 오는 거. 또 있죠. 출연료 오른 거. 하지만 이런 것보다 내가 영화를 온전히 이끌고갈 내공이 쌓였는지, 나 때문에 영화가 피해보는 건 아닌지 하는 책임감이 엄청나네요." 아무래도 그에게 '처음'은 떨림이기보다 부담에 더 가까운 듯싶었다.

1990년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한 그는 최근 충무로에서 손꼽히는 감초 조연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2001년 '파이란'에서 시작된 조연 행진은 지난해 '오버 더 레인보우''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별''블루''남남북녀''오! 브라더스''위대한 유산' 등으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자신은 "감독 사인 없이 2루 베이스 훔치고 혼자 좋아하는 것 같아 욕으로 들린다"지만 이게 다 '영화는 좀 떨어지는데 어쨌든 공형진은 재미있지 않아?'라는 관객의 입소문이 퍼진 결과다.

감초 조연의 제1조건이라면 순발력과 재치일 터인데 그는 정작 "개인기 한번 해보라는 사람이 제일 밉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형진을 자신의 영화 한구석에 꼭 끼워넣으려는 그 많은 감독들의 '몸부림'은 어찌된 일일까-. 지난해 하도 '우정출연'이 많아 "대한민국 우정은 공형진이 다 챙긴다"는 농담마저 돌았는데?

"출연료가 싼 게 가장 큰 이유죠, 하하. 뭘 시켜도 열심히 하니까가 답인 것 같아요. 불러주는 데 대한 보답에서라도 뭔가 하나는 보여드리려 용을 썼거든요."

그렇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라는 프로 정신이 비결이었다. 뭔가 보여주기 위해 그가 얼마나 발버둥쳐왔는지를 가늠하려면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사 한 토막을 소개해야 한다. 연예계에서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던 98년 말 그는 음료수 한 상자를 사들고 드라마 '전원일기'세트장을 찾아갔다. 극단 유의 대표인 유인촌에게 "극단 막내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유인촌은 펄쩍 뛰었다. 너 장난하냐? 네가 무슨 막내냐?고. 당시 공형진은 "이대로 딴따라로 대충 남을 것이냐, 배우가 될 것이냐"로 절실히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결국 그는 정식 단원으로 들어가 워크숍과 정기 레퍼토리 공연을 거치며 연기 수업을 밑바닥부터 다시 받았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1학년 시절 '에쿠우스'를 보고 팬이 됐던 최민식과 가까워진 것도 여기서였다.

"최선배님이 '해피 엔드'시사회가 끝나고 소주를 마시다 불쑥 그러더군요. '형진아, 열심히 해라. 넌 생긴 건 꼭 인민군 개밥그릇같이 생겼는데 열심히만 하면 숀 펜처럼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놈이다'라고. 엄청난 격려가 됐죠. 그 후 최선배님 소개로 '파이란'에 출연하면서 제 충무로 인생이 꽃피었다고 할 수 있어요."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이런 부단한 열정의 세월을 거친 배우 공형진이 어떻게 주연급으로 한발짝 나아가고 있는가를 목격할 수 있는 영화다. 림동해는 직속 장교 최백두(정준호)와 뱃놀이를 나갔다가 난파돼 남한의 한 해수욕장으로 넘어온다. 자본주의 사회 앞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는 순진한, 그러나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챔피언'을 불러제끼는 끼 넘치는 북한 청년이 그의 몫이다.

'한 애드리브'로 알려진 그의 실력이 여기서도 예외없다. '조국에 탯줄을 묻은 자는 심장을 바쳐야 한다-근데 어따 바칩니까?''강철같은 사상은 바위도 쪼갠다-그거 다 거짓말임다'식으로 점잖은 최백두와 주고받는 대화 중 웃음이 터지는 대목은 다 즉흥 연기란다.

그는 내년 2월 전쟁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고일병 역으로 다시 관객을 만난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은 언젠가 공형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절대로 배우 오래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너였다. 그런데 잘 성장해서 기쁘다"고. 그러고보니 그는 '쉬리'때 강감독 사무실로 1백여일을 출근했다 결국 캐스팅되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4년 만에 이뤄진 꿈. 강철같은 자기관리와 부단한 노력은 바위는 물론 불가능을 뚫는 법이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