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작가들이 가야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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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8세기의 통쾌한 풍자작가 스위프트는 『책들의 전쟁』이라는 책에서 전세기의 우뚝한 작가들, 가깝게는 밀턴·셰익스피어·초서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작가 입장을 꿀벌의 상징으로 비유하고 자기들시대(18C)의 작가 입장을 거미로 비유하고 있다. 꿀벌은 그의 날개로 자연속의 꽃밭을 누비며 꿀과 봉밀을 만들어 자기 세계의 영역을 꾸미지만 거미는 자기 가슴속에 뭉쳐진 즙을 뽑아 거미줄이라는 세계를 꾸민다.
18세기는 그만큼 많은 말들로 쓰여진 책더미 속에 작가들이 파묻혀 그것을 읽어 즙을 만드느라 미처 자연의 꽃밭을 볼 사이도 없고 세계를 자기 눈으로 읽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속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는 남의 말과 남의 논리와 남의 감수성을 찾아내어 자기가 읽은 조그마한 세계를 표현한다.
그들은 기껏 세계의 변두리나 지방 말을 써서 자기세계라 자칭할 수밖에 없다.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아니 한심한 운명 속에 놓여있는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신·구 논쟁은 모든 문학사에서 반복되는 코미디 같은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문학판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스위프트가 보았던 것과 비슷하지나 않은지 모른다.
진지하게 문학을 생각하는 작가들 치고 대형서점에 들어가 거기 쌓인 책들을 보고 절망감을 경험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거기 무수히 많은 작가들의 이름과 책제목, 그리고 말들…. 더구나 서양으로부터 물밀듯 들어온 저 현란한 수사와 논리, 빛나는 감수성·한숨소리·비탄·고뇌 등이 담긴 말의 집을 읽고 어떻게 자기 말을 자기 말이라고 배짱 좋게 내세울 수 있겠는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이 무겁고 가벼우며 진하고 엷은 사상의 파편들에 독자들이 맞아 신음하고있는 세기에서 작가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전 세대 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니 자연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의 원체험, 문학적 체험이 뿌리내렸던 전통 농경사회는 이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상처를 안겨 줘 작품에서 즐겨 다뤘던 분단이나 6·25상흔도 이제「대표작」들로 거의 동이 났다.
특히 60, 70년대 도시 시멘트바닥에서 자라 자연에 대한 향수도, 분단에 의한 아픈 기억도 없는 90년대 젊은 작가들은 무엇을 써야 하나. 독서에 의한, 대중 소비문화에 의한 한없이 가벼운 상상력이라 비난받고 있는 우리의 젊은 작가들이 찾아가야 할 세계는 없는 것인가.
본질은 사라지고 욕망의 매개들만 판치는 알맹이 없는 삭막한 시대를 위무하기 위해 우리시대 작가, 문학의 길 찾기가 궁금하다.
아직은 진짜 토종꿀에 목말라하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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