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과 기생(上)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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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27면

황진이의 전성시대다. 황진이 영화가 또 개봉됐다. 성춘향과 더불어 한국 영화에서 리메이크 소재의 쌍두마차다. 황진이와 성춘향이 기생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지속적이고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됐을까. 기생은 예나 지금이나 아련한 환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공인된 성적 존재’라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생의 본래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조선 기생은 대부분 관기(官妓)였고, 그들은 기능인이었다. 기생은 기녀(技女), 즉 연회를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춤과 노래에 전문성이 있었다. 그 기능에 대해 정기적으로 테스트를 받았다. 시험 성적이 계속 나쁘면 서울 기생이라도 함경도 같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당시 기생의 정년은 50세였다. 기생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라기보다는 기능인이었다는 점을 또한 방증한다.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역할 나이가 지금보다 어렸다. 50세면 할머니였다. 성적 매력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럼에도 나이 든 기생은 연회를 능란히 이끄는 기능인으로 꼭 필요한 존재였다.

물론 조선 남자들은 기생의 성적 매력에 목을 맸다. 국가가 기생을 둔 본래 의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은 500년 동안 기생을 놓고 고위층 남자들과 끊임없이 어정쩡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위 관직자나 종친들 중에는 연회에서 만난 관기를 막무가내로 자신의 집에 잡아두거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는 기생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일부 관직자는 데려간 기생을 점고(點考ㆍ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사람의 수를 조사함) 때만 살짝 관에 돌려보냈다가 다시 데려왔다.

국가는 이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관기의 공공성을 포기하지도 못했다. 양반들과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위 관직자들이 관기를 사사로이 점유하는 것을 비난하는 기사가 끊임없이 나온다. 조선에서 양반 남자들이 기생과 사귀는 것은 틀림없이 권장사항은 아니었다.

다만 변방에 가족 없이 파견되는 관직자는 예외였다. 이들에게는 한시적으로 기생과 사는 게 공인됐다. 이른바 수청기(守廳妓)이다. 수청은 하룻밤 동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성관계를 포함한 현지처 역할을 뜻하기도 했다.

『노상추 일기(盧尙樞 日記)』로 유명한 노상추(1746∼1829)를 보자. 그는 무과 급제 직후(1787) 삼수 갑산의 진장(鎭將)으로 파견됐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수발을 들어줄 수청기를 찾았다. ‘변방 관직자의 수발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임 두 달 만에 갑산부 소속 기생 석벽(惜壁)을 알게 됐다. 당시 노상추는 40세가 넘었고 석벽은 16세였다. 노상추는 “석벽이 장차 사람 꼴이 될 듯하고 또 버릴 수 없는 어떤 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갑산부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노상추는 “내가 하급 무관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에서 들어주지 않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끝내 내 청을 안 들어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변방에 파견된 관직자는 당연히 수발을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노상추는 석벽을 수청기로 삼았다. 1년8개월 후에는 딸까지 얻었다. 딸이 생기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파견 관직자와 수청기의 관계는 비록 공인된 것이라 해도 틀림없이 한시적인 것이었다. 돌아갈 때는 혼자만 돌아가는 게 원칙이다. 노상추는 ‘법대로’ 기생 석벽을 두고 갈 것인가. 그렇다면 딸아이는 어떻게 하나. 다음에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