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A 투어 아시아 선수 최다승 최경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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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12면

AP=연합뉴스
최경주 선수 가족. 부인 김현정씨, 딸 신영, 아들 호준(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 .중앙포토

최경주 선수가 2002년 5월 첫 승을 거뒀을 때는 ‘올림픽 금메달 10개 이상의 값어치’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벌써 5승이다. 아시아 선수의 PGA투어 최다승. “잭은 앞으로 또 다른 아시아 선수가 5승을 거두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코리안 탱크의 ‘마이 웨이’

잭은 ‘황금곰’ 잭 니클로스(미국)를 말한다. 니클로스는 최 선수의 우상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메모리얼 토너먼트는 니클로스가 주최한 대회였다. 여기서 최 선수는 타이거 우즈(미국)ㆍ어니 엘스(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수퍼스타들을 제압하고 정상에 올랐다. 니클로스가 직접 트로피를 수여했다.

“20년쯤 됐나요. 잭이 쓴 골프 교습서를 처음 본 게. 그런데 잭이 주최하는 대회에 나가서 우승까지 했다니. 제가 그때 읽은 책 제목이 『마이 웨이』였어요.”
대회 개막을 앞두고 최 선수의 아내(김현정씨)가 “이번 주엔 꼭 우승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최 선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현실이 됐다.

3라운드에서 5타를 줄였지만 선두와는 여전히 5타 차. 최 선수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모아 함께 기도했다. 그만큼 우승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최 선수는 최종 4라운드에서 전반 9홀에서만 무려 6타를 줄였다.
“17번 홀에서는 약 6m 거리의 파 퍼트가 남았는데 아찔했지요. ‘하나님, 여기서 보기를 하면 18번 홀에선 버디가 어려워요’ 하고 되뇌었지요. 그랬더니 퍼팅 라인이 흰 줄을 그은 것처럼 또렷이 보였어요. 이게 아무 때나 보이는 게 아닌데. 주저 없이 퍼트를 했는데 공이 홀 앞에서 2∼3㎝를 꺾여서 홀 가운데로 떨어지는 거예요.”
최경주 선수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정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5년 12월 김현정씨와 결혼하고 나서다.

“1999년 세례를 받고 난 뒤 운동선수만 느낄 수 있는 서러움, 완도 출신 촌놈에 대한 차별이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최 선수가 국내 투어 첫 승을 거둔 것은 95년 5월 88골프장에서 열린 팬텀 오픈이었다.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처가의 허락을 받고 김현정씨와 결혼했다. 노래방에서 남진의 ‘빈잔’을 부르면서 청혼했다. 그는 “나의 빈 잔을 채워달라.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다섯 차례나 오르면서 약속을 지켰다.

프로에 데뷔한 94년 최 선수가 받은 상금은 1044만원. 생활비를 대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최 선수는 95년 팬텀 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96, 97년 연속 상금왕에 올랐다. 97년엔 상금으로만 1억590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런 그에게 97년 10월 월드컵 골프대회 출전은 큰 변화를 불러왔다.

“미국에 가보니까 잔디도 다르고, 갤러리도 많고, 상금도 엄청나고, ‘아 이런 세상이 다 있구나’ 싶었어요. 무조건 이 땅에 태극기를 꽂겠다고 결심했지요.”
주변 사람들은 최 선수를 만류했다. 그가 만난 스물다섯 명의 선배는 약속이나 한 듯

“시기상조다. 차라리 아시안 투어나 일본 투어를 노려라”고 권했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그는 “5년 계획을 세웠다. 5년 안에 PGA 투어에 못 가면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최 선수는 99년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퀄리파잉 스쿨을 통해 PGA투어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듬해 성적이 좋지 않아 2000년엔 다시 퀄리파잉 스쿨에 도전해야 했다. 그는 “그때 생각은 하기도 싫다. 몸과 마음이 너무나 힘들어서 퀄리파잉 스쿨을 왜 ‘지옥의 라운드’라고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 선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담배는 입에도 안 댄다. 자다 일어나면 담배부터 찾는 애연가였지만 2000년 2월부터 담배를 끊었다.

“2월 24일에 끊었지요. 집사람 생일이 2월 26일인데 생일 선물로 금연을 선언했어요. 그런데 담배 끊고 나니 샷 거리가 늘어나데요.”

최 선수의 올 시즌 드라이브샷 평균 거리는 279야드로 전체 선수 가운데 133위에 불과하다. 평균 샷 거리가 300야드를 넘는 장타자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뭘까.

지난 5월 열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최 선수는 1, 2라운드에서 타이거 우즈, 헨릭 스텐슨(스웨덴)과 한 조에서 라운드했다. 우즈는 말할 것도 없고, 스텐슨 역시 PGA투어에서 손꼽히는 장타자다. “아 정말 죽었구나” 싶었다. 장타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나 싶어서.

결국 최 선수는 ‘너는 질러라, 나는 나대로 한다’고 작정했다. ‘마이 웨이’를 선택한 것이다. 1라운드에서 최 선수는 71타를 쳐 스텐슨(72타)과 우즈(75타)를 눌렀다. 2라운드 합계에서도 145타를 기록해 나란히 148타를 기록한 스텐슨과 우즈를 앞섰다.

“저도 장타자를 만나면 긴장이 돼요. 그렇지만 그들도 긴장한다는 걸 알지요. 그래서 저만의 게임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최 선수는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 선수와 인사를 나눈다. 때로는 상대 선수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엉덩이를 툭 치며 기선을 제압한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애덤 스콧(호주)을 만나건, 어니 엘스를 만나건 그는 절대로 주눅이 들지 않는다.

PGA 투어에서 8년째를 맞는 최 선수는 지금까지 상금으로만 1372만 달러(약 130억원)를 벌었다. 유럽 투어나 국내 투어 상금을 뺀 액수다. 그렇지만 그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불우한 어린이를 돕기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100점을 채우려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해야겠지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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