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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20주년 (中) 달라진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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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7년 6월 8일 서울시청 앞 광장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20년 전인 1987년 6월 10일 수많은 시민이 모여 평화적 시위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열어젖혔던 현장이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야제(9일)와 '민주주의 시민축제'(10일) 등 각종 기념행사가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사진=강정현 기자]


10일은 6월항쟁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87년 이날이 좌우의 이념을 떠나 기념할 만한 한국 민주주의의 한 이정표로 자리 잡고 있다. 뉴라이트 선진화운동을 이끄는 신지호.김영환.구해우씨는 그날과 오늘의 '달라진 꿈'을 얘기하면서도 "6월항쟁은 민주주의의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했다. 유명한 운동권 이론가였던 이진경씨는 지난 20년간 변화한 현실과 진보-보수의 달라진 구도를 이야기한다. 이씨에게 변할 수 없는 것은 "좀 더 나은 세상 꿈꾸기"이다.

"민주화서 선진화로 시대정신 바뀌어야"
뉴라이트로 변신한 당시 주역들

7일 오후 어둠이 서서히 깔려가는 서울시청 앞 광장. 20년 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었고, 지금은 뉴라이트 선진화운동을 이끄는 이들이 그 뜨거웠던 현장에 다시 섰다.

자유주의연대 대표 신지호(연세대 81학번), 뉴라이트 기관지인 '시대정신' 편집위원 김영환(서울대 82학번), 미래재단 상임이사 구해우(고려대 84학번)씨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또 민주화 운동을 할 겁니다. 하지만 우물안 개구리였죠. 유럽만 가봤어도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알았을 텐데…."(신지호)

6월항쟁 당시 신씨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김영환씨는 구속돼 감옥에서 6월항쟁 소식을 들었으며, 구해우씨는 학생운동 비공개 조직의 리더로 시청 앞 시위에 참여했다.

구씨는 "당시 구치소에 수감됐었는데 잡혀온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나왔을 정도로 많은 이가 참여했지만 종합적으로 시위를 지휘하는 지도부는 없었다"고 회고 했다. 그런 정도의 대규모 대중운동을 이끌어본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6월항쟁은 뉴라이트에게도 기념돼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6월항쟁의 민주주의 정신을 기념하는 것이 올드라이트와 다른 뉴라이트의 특징"이라고 이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시청앞 광장으로 오기에 앞서 이들은 이날 자유주의연대가 주최한 '6월항쟁 20주년 기념-민주화 20년에 대한 평가와 선진화 비전'이란 주제의 토론회에 참여했다. 진보 진영이 여는 행사와는 또 다른 의미의 6월항쟁 기념 행사였다.

이들은 1980년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원했던 사회는 사회주의였다고 밝혔다. 이들의 꿈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의 붕괴 소식을 접하면서다.

"80년대엔 투철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소련과 동유럽 붕괴 충격이 너무 컸어요. 이후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이념과 근현대사 등을 다시 보려고 했습니다."(김영환)

"소련 붕괴의 충격 이후 앨빈 토플러 등의 책을 보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94년 중국에 갔을 때 당 간부나 노동자 등의 생활을 보면서 사회주의가 이상이 아님을 확신하게 됐습니다."(구해우)

"80년대 운동권에는 '한국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는 못살게 된다' '미.일 독점자본에 대한 예속은 더 심해진다'는 철칙이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을 할 땐데 80년대 중반 이후 3저 호황을 거치며 그런 철칙이 깨지고, 호황의 혜택이 노동자들에게도 돌아가는 것을 실감했어요."(신지호)

시대정신이 변했기에 과거의 패러다임을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건국-산업화-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했다.

배영대 기자

"민주 대 반민주 전선 다수 대 소수로 이동"
진보 진영 이진경 교수

"1987년 6월항쟁은 대중의 다양한 꿈이 모였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90~91년의 사회주의권 붕괴는 6월항쟁 세대의 다양한 꿈들을 분화시켰죠."

7일 밤 서울시청 부근의 한 카페에서 이진경(서울대 82학번.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토론회-상상 변주곡'의 발제를 막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80년대 학생운동권의 주요 이론가였던 그는 지금도 국내 진보 논리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6월항쟁 당시의 잣대로 보면 그 역시 많이 달라졌다. 그는 21세기 진보운동의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좌익적 사유는 가능한가?'가 그의 화두다.

"80년대 진보운동이 국가 전체를 바꾸는 대규모 혁명을 꿈꾸었다면, 지금 나는 비(非)국가 단위의 소규모 공동체 운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공동체가 생겨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세상을 꿈꾸는 거죠."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소규모 학문 공동체에서 자신의 달라진 꿈을 실험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탈근대주의 이론을 접목해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도 그의 주요 활동이다. '노마드(유목민)'란 말을 유행시키는 데 톡톡히 한몫하기도 했다. 안주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진보다. 그가 진보진영 내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는 이유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겐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마저 접을 순 없다"는 것. "20세기 사회주의가 이상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면, 사회주의 아닌 다른 것을 구상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그는 말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세태를 그는 안타까워했다. "6월항쟁 이후 지난 20년간 많이 좋아진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더 나아졌다는 생각에 안주하면서, 정작 더 나빠진 것은 아예 보려고 하지도 않는 자세가 문제 아닐까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위도 결국 우리 시대의 현안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과 직결돼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지금은 6월항쟁 때와 같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시대가 아닙니다. 전선이 이동했어요. 노동자 분포만 봐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50%를 넘고 외국인 노동자도 많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달라진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전선은 이제 '다수(메이저리티.주류) 대 소수(마이너리티.비주류)'의 구도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계급도 진보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고 했다.

"주류의 잣대에 안주하지 않고, 주류의 기준에 반할지라도 비주류 소수와 함께하는 길을 찾아야 이 시대의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시민운동의 위기'를 우려했다. "새만금사업에 대한 투쟁이 중단되는 과정에서 보듯이 시민운동 분야에서 사법적 판결을 최종적 판단으로 삼는 경향이 지나치게 확산되고 있어요. 이 또한 6월항쟁의 성과를 향유하며 안주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배영대 기자<balanc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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