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유럽의 지성들, 참 많이도 아파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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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의식과 사회/ 막다른 길 / 지식인들의 망명
H. 스튜어트 휴즈 지음, 황문수·김병익·김창희 옮김
개마고원, 368~488쪽, 2만~2만5000원

책 좀 읽는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이 '서구 지성사 3부작'에서 어디서 본 듯한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 지성사가(知性史家) H. 스튜어트 휴즈의 이 저서들은 1979~1983년 사이에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다. 세 권 가운데 '의식과 사회'는 예전 번역본과 제목이 같고, 나머지 두 권의 예전 번역본 제목은 '현대 프랑스 지성사', '파시즘과 지식인'이었다. 눈 밝은 기획자가 이 3부작의 가치를 꿰뚫어보는 덕에, 제목과 함께 번역 문장을 많이 고치고 다듬어 새 책과 다름없이 만들어 간행하게 된 것'이다.

'막다른 길'의 번역자 김병익은 당시 역자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시대의 지성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괴로워하며 싸워왔는가, 그 괴로운 싸움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새삼스레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때와 곳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이 지니게 될 쓰라림의 공통성을 다시 한 번 찾게 되는 것이었다.' 기나긴 독재 치하에서 벗어나는가 싶다가 다시 독재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던 시기 우리 지식인의 괴로움이 이 책을 번역하게 만든 역설적인 동력이었을 것이다.

각 권의 내용을 개괄해보면, '의식과 사회'는 1890~1930년 사이 유럽 사회사상의 다양한 흐름을 살피고 진단한다. 특히 실증주의와 반(反)실증주의의 대결을 축으로 삼고 있는데, 각각 무의식과 경제적 하부구조를 발견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양상에 주목한다. 또한 베버, 뒤르켐, 파레토 등의 학문적 관심과 배경을 각별히 살핌으로써, 사회학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립되는 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그러나 유럽 지성계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참상 앞에서 깊은 회의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휴즈는 헤세의 '데미안'을 원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럽 사회의 낡은 세계는 파괴할 만한 가치밖에 없다고 데미안은 주장했다. 아니, 오히려 이 세계는 스스로의 도덕적 부패 때문에 자멸의 문턱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 자멸의 문턱에 선 서구 지식인들을 휴즈는 1930년대~1960년대를 무대로 두 갈래로 나누어 파악한다. 하나는 우월적 지위를 상실한 '프랑스 사회사상, 그 절망의 시대'이며, 다른 하나는 파시즘의 창궐을 피해 망명한 지식인들의 '대(大)항해 시대'다.

프랑스의 군사적 낙오, 경제적 우위 상실, 외교적 수세 속에서 프랑스 지성계는 전통적인 문화적 우월감이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인하면서 새로운 지적 모험에 나서지만, 그것은 분열적이고 한계가 분명했다. 휴즈는 이 '막다른 상황'으로 치닫는 배경 속에 뤼시앵 페브르, 마르크 블로크, 앙드레 말로, 생-텍쥐페리,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의 지적 편력을 자리매김한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국가적 자부심의 기이한 복합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휴즈의 진단이다.

한편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유럽을 떠나 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들은 이질적인 문화권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존속 가능성 문제, 자기가 떠나 온 문화 혹은 민족의 악마성에 대한 반성 문제 등 다양한 문제 상황에 내몰려야 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과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을 지성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휴즈의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휴즈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실증주의와 현상학 및 실존주의로 나누어져 있던 사유 양식들을 하나의 지적 세계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한 철학자다.

이 3부작을 그 번역본이 첫 선을 보인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까닭은 분명하다. 지성사의 큰 맥락과 그 맥락 안에 자리한 개별 사상가들을 '순환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좋은 길잡이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강경하고 닫혀 있는 민족주의나 급진주의의 소아병적 증상'(김병익)이 30년 전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책은 우리 지성계 혹은 지식인 사회가 안고 있는 현재진행형 문제를 비춰주는 통감(通鑑)이기도 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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