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여성의원이 정치 확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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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7대 총선이 채 4개월도 남지 않았다. 작금의 우리 정치상황은 마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형국이다. 한편에서는 부패와 비리,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돼 온 한국 정치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나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국민의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정치개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의제가 바로 여성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는 일이다. 필자는 여성의원들이 30%, 아니 50% 이상 늘어나는 것 그 자체가 어떤 복잡한 제도적 장치보다 더 확실하게 정치개혁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성의원 비율이 높을수록 국가청렴도 혹은 반(反)부패지수가 높다는 국제 비교자료들이 이미 축적돼 있을 뿐 아니라 국내의 한 시민단체가 실시한 16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평가에서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정책심의.대안제시.공정성.민주성.성실성 등 5개 평가항목에서 모두 크게 앞섰다. 국민이 절실히 원하는 '깨끗하고 생산적인 국회'를 위해 여성의 진출 확대가 거역할 수 없는 명제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여성의원 비율이 5.2%로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고, 그간 남성이 중심이 돼 온 우리 정치가 부패와 비리로 얼룩져 엄청난 국민적 불신과 냉소를 불러왔음을 상기할 때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는 당위성을 논의하는 단계는 이제 지났다고 본다.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만들고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여성정치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지역구 진출이다. 그러나 지역구 진출에 관한 한 여성들이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은 매우 두껍고 높다. 다행히 현재 양성평등구제나 여성전용구제 등과 같은 여성친화적인 선거구제 도입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각 정당이 앞다투어 공천심사 과정에서 여성후보에게 가산점을 준다든지 유력한 여성후보가 있을 때 무경선 공천하는 방식으로 내부의 장애를 돌파하는 장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위헌이니 역차별이니 하는 논란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우대조치는 사회적 소수를 위해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잠정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로서, 수단합리성을 기준으로 그 적실성을 따지기보다 목적합리성의 측면에서 평가돼야 할 것이다.

국회의 왜곡된 대표성을 회복하고 과거의 부패와 비리로부터 자유로운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가 돼 희망과 감동의 정치를 만들고, 깨끗한 정치, 보살핌의 정치, 평화의 정치를 실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목적 합리성이 충족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단의 불합리성도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근시안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우대조치가 여성에 대한 특혜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긴 호흡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 본다면, 이것은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을 해소하고, 왜곡된 상태를 정상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일 뿐이다.

돌돌 말린 상태로 오래 두었던 종이는 그대로 두어서는 펴지지 않는다. 반대쪽으로 되감아야만 펴진다. 여기에 힘을 가한다면 펴지는 시간이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양성평등과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한 여성 우대조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조만간 확정될 국회의 정치개혁안에 모쪼록 여성 참여를 담보할 수 있는 적극적 조치들이 포함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것이 국민의 불신과 냉소를 불러오는 정치로부터 국민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정치로 바꾸어 내는 길이자, 죽어가는 한국 정치를 살리는 확실한 길임을 믿기에 말이다.

진수희 여의도硏 선임연구위원.세종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