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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농성은 '국민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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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987년 6월항쟁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이 중 명동성당 농성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6.10 국민대회에 참가한 25만 명의 시위대 중 경찰의 진압에 밀린 400여 명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이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대규모 거리시위와 국민적 호응이 이어지면서 6월항쟁으로 발전했다. 명동성당 농성은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5박6일 동안 계속됐다.

◆촉매제가 된 성당 농성=충남대 4학년 복학을 앞두고 있던 조충호(46.광고대행사 대표)씨는 개인 용무를 보기 위해 서울에 있었다. 그는 을지로에서 수만 명의 학생.시민 시위대와 조우했다. 구호를 따라 외치며 인파와 최루 연기에 파묻혀 행진하다 명동성당까지 떠밀려 갔다. 최루탄을 피해 성당 안으로 들어갈 무렵 경찰이 정문 입구를 차단했다. 경찰의 봉쇄는 밤늦도록 풀리지 않았다. 시위대 대부분이 조씨와 함께 얼떨결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5일간 현장을 지켰던 나도은(47.당시 명동청년회 소속)씨는 "성당 앞 공중전화 박스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며 "저마다 '왜 안 들어 오느냐'고 걱정하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고 회상했다.

◆넥타이 부대의 등장=명동에서 근무하던 정일영(52)씨는 11일 점심시간에 성당 앞으로 향했다. 경찰의 바리케이드 앞쪽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400여 명 보였다. 정씨는 "누군가가 '독재타도'라고 외치니 자연스럽게 '호헌철폐'라는 응답이 따라 나오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1시간 동안 정씨는 명동 골목에서 구호를 외치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외환은행에 근무하던 전재주(51)씨는 동료들과 모금한 16만8000원과 편지를 묶은 돌멩이를 성당 담장 너머로 던졌다.'외환은행 민주노동자' 이름의 편지는 성당 앞에 대자보로 걸렸다. 퇴근 뒤 명동성당으로 달려가곤 했던 남을우(50)씨는 "6월 내내 넥타이 부대가 명동을 지켰다"고 말했다.

◆여고생.상인들도 동참=계성여고 2학년이었던 김정선(37)씨는 12일 아침 집에서 양말 몇 켤레를 가방에 넣어 왔다. 점심시간에 낮은 담 하나를 맞대고 있는 성당의 시위대에 양말을 전달했다. 자신이 먹으려고 싸온 도시락을 넘겨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김씨는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남대문 상인들도 팔던 옷가지들을 계성여고 후문을 통해 명동성당의 시위대에게 전해줬다. 양품점을 하던 김순임(68.여)씨는 시위대에 필요한 속옷을 사기 위해 주변 상인들과 돈을 모았다. 당시 퇴계로와 중앙극장.한국은행 등 명동성당 근처를 돌며 경적 시위에 참여했던 택시기사 박채영(47)씨는 "'아침이슬' 가사의 의미는 몰랐지만 '이 정권이 오래 못 간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송지혜.장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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