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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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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세계 곳곳 가보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 하지만 북한처럼 이상한 나라는 없었다. 평양에 도착한 뒤 두어 시간 만에 아리랑 축전이 열리는 운동장의 귀빈석에 앉아 북한은 참 이상한 나라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리랑 축전은 북한이 체제의 우수성을 과시하려고 매년 수주에 걸쳐 여는 멀티미디어 공연이다.

이 두 시간짜리 공연에 약 6만 명이 동원됐다. 나치 전당대회와 193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을 반반씩 섞어놓은 공연 같았다. 무용가, 체조선수, 곡예사들이 축구장만 한 공간에서 한 몸이 된 듯 일사불란하게 화려한 공연을 펼치는 동안 스탠드의 수천 명은 카드섹션으로 거대한 동영상 쇼를 연출한다.

수천 개의 카드가 장렬하게 나부끼는 깃발, 행복해 하는 국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탄 배가 험난한 파도를 뚫고 지나가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특히 북한 농업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쇼는 기상천외했다. 스탠드에서 거대한 토끼들을 배경으로 만들어내면 아래 무대에선 토끼 분장을 한 어린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북한인 안내자는 식량난 해소 수단으로 정부가 토끼를 활용하는 새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아무튼 우리나라에는 토끼가 뜯을 풀은 많다.”

어디를 가도 안내원들이 따라다녔다. 외국인 방문객이라면 북한 정부가 붙여주는 안내원 없이 돌아다니기는 불가능하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7명으로 구성된 우리 관광단에는 안내원이 3명이나 배치됐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안내원의 눈길을 벗어나자 곧바로 안내원 한 명이 헐레벌떡 쫓아가 데려왔다. 한 관광지에서 우리는 얼큰하게 취한 한국 사업가 두 명을 만났다. 그들에게 말을 붙이기가 무섭게 안내를 맡은 북한 사람들이 그들을 막무가내로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

우리 안내원들은 북한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삶의 참모습을 보여주려는 자기네 사람들조차 믿지 못하는 듯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려고 하면 아무리 피상적인 대화라 해도 곧바로 제지했다.

일상 생활이나 정치 상황을 물으면 우리 안내자들은 한결같이 정부의 공식 입장을 그대로 전했다. 예를 들어 북한의 동성애자 정책을 묻자 한 안내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에는 동성애자가 없다. 우리는 동성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안내원들은 시골의 모습을 촬영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농민들의 극심한 빈곤상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 듯했다.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텅 빈 평양 거리를 촬영하는 일도 금지됐다. 수도인 평양 거리 역시 해가 떨어지면 암흑 지대로 변했다. 만성적인 전력난 때문인 듯했다. 심지어 길가에서 장기를 두는 사람들을 사진 찍으려 해도 안내원들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질겁했다.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북한 자체와 그 사회가 지향하는 바를 말해주는 실마리는 여럿 감지됐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북한과 중국의 무역량 증가에 따른 효과였다. 북-중 무역은 지난 6년 동안 급성장했다. 냉장고에서 테니스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산 제품들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절을 구경하다가 마주친 북한인 관광객들은 영어와 외국 상표가 선명한 티셔츠와 조깅바지 차림이었다. 평양 시내의 어린이들은 공산당 청소년 조직의 유니폼인 붉고 푸른 옷을 입었지만 신발은 리복 제품인 경우가 많았다.

평양 시내에서 본 한 여성은 ‘짝퉁’ 샤넬 핸드백을 들고 다녔다. 황금색 체인과 상표까지 완벽해 보였다. 남한 제품도 심심찮게 보였다. 남한은 7년 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연 이래 북한과 더욱 활발하게 교류해왔다. 어느 날 저녁 9시께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수십 명이 여러 개의 작은 원을 그리며 땅바닥에 앉아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촛불과 랜턴이 놓여 있었다. 임시 가두 식당인 듯했다. 이곳에도 초보 수준이긴 해도 기업가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요란한 선전 포스터와 위세 높은 노동자 동상 등 지금의 북한이 1980년대 초의 소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회이기에 그런 변화의 조짐은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 사람들이 풍요를 누린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무역 증가의 혜택이 서민들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은 명백했다. 고위 당 간부, 군 간부, 비밀경찰 같은 엘리트층은 나날이 생활이 윤택해진다.

그러나 생활고에 찌든 모습이 역력한 서민들은 여전히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수준이다. 도로는 텅 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 보이는 자동차는 대개 도요타 세단이나 미쓰비시 스포츠다목적차량(SUV)이었다. 운전석에는 주로 인민복 차림에 당간부 배지를 단 사람이 보였다.

반면 말 없는 서민들은 간선도로 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묵묵히 걸어다녔다. 많은 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유명한 절을 찾아갔을 때 한 북한 남자가 짙은 황록색 인민복에 선글라스와 불룩한 머리 모양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똑같이 꾸미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은 최신형 일제 디지털 카메라와 소니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남한 사람들이 보통 그러듯이 동료들에게 ‘치즈’라고 영어로 외치며 웃는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한편 농촌 사람들은 옛날 옛적의 바퀴 두 개짜리 달구지와 50년 된 낡은 트랙터나 아주 초보적인 농기구로 땅을 일구었다.

한번은 안내인들에게 남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근래 들어 남한 사람들과 접촉이 많았는데 안내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사나 못사나?” 안내원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남한이 잘산다고 인정했다.

1970년대까지는 북한과 남한의 생활 수준이 비슷했는데(몇몇 서방 전문가도 동의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 뒤로 자기네들은 자연재해를 많이 당했고 미국인들의 경제 봉쇄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자기네가 남한 사람들보다 더 잘산다고 주장했다. “북한에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자기네는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었다.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남한 사람들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남한 정부가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나?” 안내원들은 대답하기 싫은 듯 한참 뜸을 들이다가 내가 다그치자 마지못해 입을 뗐다. 남한 땅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그곳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라고 볼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맞다고 했다. 남한 사람들은 조선을 대표할 자격이 없으며, 남한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모르나 북한은 정신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주장이었다. 북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기강이 잘 서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 경제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남포는 북한 서부의 주요 항구 중 하나다. 하지만 그곳에서 짐을 부리는 배들은 요즘의 세계 시장에서 필수적인 화물 컨테이너를 사용하지 않았다. 관광을 하는 동안 작은 야외 시장들이 얼핏얼핏 눈에 들어왔다. 대개는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높은 콘크리트 담에 가려져 있었다. 이런 시장들은 체계적인 개혁의 결과라기보다는 혹독한 경제 현실을 마지못해 인정한 데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안내자들에게 시장 구경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북한에는 민간 경제가 없다며 시장이 있다고 알았다면 오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북한은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하는 대가로 철광석에서 한약재에 이르는 다양한 원자재를 제공한다(아무튼 중국은 고도성장에 필요한 자원이 늘 부족하다). 일부 열성적인 북한 기업가는 고철을 팔려고 공장을 완전히 해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쪽 개성시의 고층 아파트 벽에는 누군가 떼어낸 금속 빗물 파이프의 흔적이 역력했다.

외국인 취재원 중에는 요즘 북한에선 이념보다 돈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을 자주 오가는 취재원들은 북한 사회에 부패가 만연한다고 전했다. 북한은 경찰국가의 전형적인 이점으로 손꼽히는 ‘범죄 없는 사회’도 아닌 듯했다. 고층 건물의 1층과 2층 창문에는 튼튼한 방범용 쇠창살이 붙어 있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할 의도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어쨌든 핵무기는 김정일 정권이 국민에게 자랑할 만한 몇 안 되는 업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제 남한이 경제적으로 더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안내원들도 그렇게 말했다). 따라서 핵무기마저 포기한다면 더 이상 내세울 게 없지 않을까.

하지만 이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정권의 정치적인 통제력은 여전히 확고하다. 몇몇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북한이라는 국가의 현재 모습은 전통적인 독재체제라기보다 강력한 종교적 우상화체제에 더 가까워 보였다. 묘향산 입구의 국제친선전람관을 찾았을 때 그런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곳은 김일성(사후인 지금도 여전히 최고 지도자다)과 그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동안 해외 인사들에게서 받은 수천 점의 선물이 전시돼 있다.

두 개의 거대한 전람관에 전시된 물품들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1945년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준 장갑 리무진)에서부터 저급스러운 것(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선사한 동물 장신구)과 터무니없는 것(잔 여러 개를 받친 쟁반을 들고 뒷다리로 서 있는 박제 악어: 나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가 친선의 표시로 선물했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전시품들은 비록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그 의도는 자못 진지하다. 북한 사람들은 곧잘 단체로 이곳을 관람한다. 국제친선전람관은 그들에게 국제사회가 북한을 깔보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시킬 목적으로 세워졌다.

아울러 외국인들에게는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진 북한이 생각만큼 그렇게 고립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물론 북한을 찾는 외국인 방문자 중에 그렇게 설득당할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북한 체제 내부에서만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그런 모습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상반되는 진실을 접할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는 대동강 변에 전시돼 있는 푸에블로호를 방문했을 때도 드러났다. 우리 안내원은 1968년 북한이 나포한 미국 정보함을 보여주며 1866년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습격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주민들의 공격으로 불타 침몰했는데 그 주민을 이끈 사람이 김일성의 증조부였다는 얘기였다. 정말 입이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히는 선전이었다.

이번 북한 관광의 압권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김일성의 밀랍 동상을 보여주는 방에 들어갔을 때의 경험이었다. 그 형상 뒤편의 나뭇가지가 인공으로 일으킨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김일성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터무니없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했다. 우리는 안내원들의 주문대로 경의를 표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깨나 뺐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그 방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훔쳤다. “그들에겐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직접 만난 거나 진배없다”고 한 안내원이 숙연하게 설명했다. 그런 기이함 속에서 사는 북한 사람들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실감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HRISTIAN CARYL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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