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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예술가들 잇단 요르단 망명(지구촌화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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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암만에 아랍문화 “활짝”/여성현실 풍자연극 『빨대…』인기/걸프전이후 다수화랑 잇단 개관·시낭송회 등 활발/민주화따른 언론·예술 전반 사전검열 철폐도 큰몫
요즈음 요르단 수도 암만의 밤거리 가운데 유달리 북적대는 곳중의 하나가 이라크인 극작가의 대본에 요르단 최고의 여배우 마즈드 알 카사스(30)가 주연을 맡은 한 연극공연장 주변이다.
여성이 집밖 세상을 접촉할 기회가 「우유 빨대를 통한 산수구경 정도로 극히 제한된」아랍세계의 분위기를 『빨대 구멍』이라는 제목으로 풍자한 이 연극은 미모의 한 아내가 남편의 외도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려가다 결국 여성의 일방적인 인종과 남성 부속품화를 강요하는 아랍사회구조에 등을 돌리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동반자가 없이 혼자 관람에 나선 경우가 대부분인 여성관객들은 공연도중 자신의 신세를 되돌아보며 흐느끼다 못해 어깨를 들먹인다. 간간이 섞여 있는 이라크 망명객들은 이 연극내용이 사담 후세인대통령의 압제를 통렬히 고발한 것이라며 심각한 표정을 짓곤한다.
『빨대구멍』은 그러나 걸프전이후 시인·음악가·화가 등 이라크 예술가들이 대거 요르단으로 몰려들면서 일기 시작한 요르단 문화계 변화의 일각에 불과하다.
걸프전이후 암만에서는 십여개의 화랑이 새로 문을 열어 대부분 이라크 화가들에게 작품활동 무대를 제공하고 다방에는 밤늦도록 시낭송회,예술가들의 토론으로 북적대고 있다. 걸프전이후 지금까지 암만에서 공연된 연극은 30여편에 이르러 걸프전이전 2년동안 2편밖에 공연되지 않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걸프전 이후 요르단 예술계가 이처럼 활성화하는 이유는 요르단의 아랍내 고립화 및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그리고 「이라크내 정치압제」가 상승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요르단의 극작가나 TV방송은 과거 이웃 걸프지역 국가들의 수요에 맞춰 저질 상업드라마에 치중했으나 걸프전때 요르단이 이라크편을 든 전과로 이들 드라마의 판로가 막히면서 국내취향·고급 극장수요층을 겨냥,상업성보다 예술성에 승부를 걸게 됐다.
또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 등에 거주하던 3만여명의 요르단·팔레스타인인 지식인들이 이라크에 부역한 혐의로 요르단으로 추방되면서 예술 수요에 기폭제가 되고 있다.
배우겸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나빌 사왈라씨는 『걸프지역,특히 쿠웨이트에 살던 사람들은 연극에 친숙해있어 우리들에게는 이들이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후세인 요르단국왕도 걸프전이후 불어닥친 자유화분위기를 참작,민주화 개혁을 단행하면서 TV방송을 제외한 언론·예술 전반의 사전검열을 철폐하고 대정부 비판에 관용을 보임으로써 예술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이런 가운데 사담 후세인대통령 정권아래서 예술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이라크 예술가들이 아랍권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경이 개방된 요르단으로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한 이라크 화가는 요르단 망명동기를 『사담 후세인정권의 창작활동 통제도 불편하지만 그보다 물감 등 재료 자체가 거의 없었다. 간혹 있다 해도 터무니없이 비싸 국가소속으로 사담 후세인 초상화 그리기외에는 작품활동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화가는 『설혹 개인작품을 내놔도 이라크 국민들은 예술을 즐길 분위기도,구입할 돈도 없어 팔리지 않는다』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집회·국가선전활동 등에 매달리다 보니 창작활동의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이들의 상당수가 요르단에서 역시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작품속에는 정신적 불안이 진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한결같이 『암만 또한 아랍이고 조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며 귀국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화랑·극장주 등 요르단의 문화계는 요즈음 『아랍세계 최고수준인 이라크 예술가들의 대량 유입을 계기로 요르단이 아랍판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며 예상치 않았던 걸프전의 부산물에 들뜨고 있다.<이기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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