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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상품화하는 예술풍조(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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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 문학 작품이 문학다운 모습을 지닐 때에야 비로소 그 작품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과 보호의 대상이 된다. 한 예술 작품이 예술성을 지닐 때에야만 그 작품은 예술의 장르속에서 그 품격을 논의하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일고 있는 문화계의 외설시비를 보노라면 도시 문학이고 예술이라고 할 대상이 아닌 것마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문단과 출판계,그리고 간행물 윤리위원회 간에 논란되고 있는 한 대학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는 과연 이것이 문학과 성의 표현이라는 문학의 고전적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냐는 강한 의문을 갖게한다.
그 의문의 밑바탕에는 이른바 예술이라는 이름을 팔아 벌이고 있는 섹스의 상품화를 보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동안 우리의 영화와 연극은 성의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명목으로 외설장면 삽입을 즐겨해왔다.
말이 성의 자유스런 표현이지 외설의 농도를 얼마나 짙게 하느냐에 따라 흥행성을 가늠하는 것이 요즘 영화계의 풍조가 되었다. 연극의 고고함과 의연함을 주장해왔던 극단마저 이제는 외로운 예술을 지키기를 포기하고 청소년 관중을 상대로 포르노식의 성애표현을 거침없이 무대위에서 실연하는 판이다.
두번째 의문은 도가 지나친 음란 표현마저 문학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고 감싸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문학과 외설의 시비를 얘기할 때 DH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이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들먹인다. 그러나 두작품 모두 성의 표현은 필요에 의해 삽입된 문학의 소도구일 뿐 성애 자체를 상품화하거나 목적으로 한 작품이 아님을 간과한다.
문제의 소설은 문학과 무관한 사람이 본다해도 문학속의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마치 포르노영화를 문자화시켜 놓은 변태적 포르노소설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이를 우리나라에서 성문제는 마치 「쓰레기통에 뚜껑만 덮어놓고 있는 양상」 같아서 해결책을 찾지 못한채 속으로 썩어들고 있다고 보고 억압된 성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 위해 이 소설을 쓴다고 강변하고 있다.
음란 비디오를 마치 거창한 예술작품이라고 떠들면서 이를 비난하는 사람을 무식한 비예술가로 모는 작태를 보는듯 하다. 설령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이 성의 해방을 통한 성문제 해결을 시도한 것이라면 이 세상의 온갖 난잡한 음란비디오나 외설 영화가 어느때 없이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데도 어째서 성폭력과 성의 문란은 시간이 흐를수록 흉포화되고 난잡해지는가.
이 모든 성의 문란과 도덕성의 마비는 바로 성을 상품화시키려는 철저한 목적을 지닌 사이비 포르노문화계 풍토에 그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문학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난잡한 음란물들을 가려내고 척결하는 일이 성문제를 바로잡는 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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