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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남덕우 前국무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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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국민이 정치 걱정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정치가 이러니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과거.현 정권이 추진한 주요 정책의 탄생과 소멸 과정을 지켜본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요즘 더욱 우울하다. 과거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도 그는 국가 비전 제시와 이의 실행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그의 따뜻한 가슴과 찬 머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그의 고언(苦言)을 듣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 시대는 그의 축적된 지식과 지혜.경륜을 필요로 한다. 중앙일보는 그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과 경제인, 그리고 국민에게 주는 그의 충언을 인터뷰를 통해 정리해봤다.

▶최:올 한 해를 보내는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남:한마디로 혼란과 당혹의 1년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이 나라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태에 있습니다. 정치권은 불법 대선자금을 둘러싸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계속하는 가운데 기업들은 공포에 떨고 있고,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질서 속에서 기업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 있는가 하면 실업자들은 살아갈 용기를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면 우리 경제는 망가질지 모릅니다.

▶최:검찰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불법 대선자금 뉴스에 국민은 머리를 흔들 정도가 됐습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남:정말로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정치자금 비리는 정치인.재계.투표권자들이 함께 빚어낸 후진적 정치 문화의 소산이고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반성하고 시정해야 할 국민적 과제입니다. 이번의 시련을 계기로 하여 정치자금 비리를 가능한 한 예방하는 제도적 개혁이 단행된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권이 문제에 매몰되어 지금의 경제.사회적 위기상황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것도 큰 일입니다. 비리에 관한 수사는 한마디로 가릴 것은 가리되 선을 그을 때는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질이 나쁘면 처벌하되 기업의 경우엔 선을 그어 기소유예하는 등의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또 시효소멸 조치를 내리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과거 5.16혁명 때 비슷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업들은 비자금 출처를 댈 수도 없고, 민사소송 문제도 있어서 큰일입니다. 이 나라 경제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선을 긋고 매듭을 짓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그 문제에 대한 매듭을 지어야 투자심리가 되살아나고 실업도 줄일 수 있을 터인데 정치권은 이를 내년 총선까지 끌고 가려 할 것입니다. 경제난은 점점 더 심각해지지 않을까요?

▶남: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으면 빨리 매듭지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 정치자금 비리에서 자유로운 정당과 정치인은 없고, 웬만한 기업 치고 음으로 양으로 정치자금을 바치지 않은 기업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검찰 조사에는 끝이 없을 것이고, 걸려든 위법자를 처벌한다 해도 공평하게 실현될지도 의문입니다. 정치적 압력과 관행을 따랐다 하여 기업인들을 처벌하고 이에 따라 기업과 경제기능이 마비되면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업 경영의 건전성을 높이는 길은 투명한 회계제도와 감사제도, 그리고 정치개혁으로 가능합니다. 이를 해결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대통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문제부터 밝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성을 보인 다음, 여야 정당이 합리적인 내용의 정치개혁 입법을 창출하라고 촉구하고, 합의가 이루어지면 검찰 수사에 선을 긋고 마무리짓도록 법무부 장관에게 지시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을 지휘할 권한과 책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당들은 불법 정치자금에 대하여 국민에게 깊이 사과하고 각 정당은 서로 용서하고 대통령의 결단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동시에 자기 정화에 뼈를 깎는 아픔을 이겨내고 차기 선거에서 투표권자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최:그러나 이 기회에 범법 정치인과 기업인을 가려내 가차없이 처단해야 사회정의가 구현되고 앞으로 그러한 비리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도 있습니다.

▶남:그러한 주장은 자고로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문제를 흑백논리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살인죄를 사형으로 다스려도 살인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그래서 사형 폐지론이 제기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문제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따라 서서히 진화할 뿐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원칙에 있어서는 단호하되 그 적용은 유연할 것, 이것은 더 없이 어려운 길이지만 또한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최:검찰의 독립을 내세우는 대통령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남:그러면 무엇 때문에 헌법이 대통령에게 각부 장관을 임면하고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했습니까.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국익의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울 수 없다는 조병옥 박사의 말씀이 생각나는데 그것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야당의 잘못과 자기 진영의 잘못의 경중을 놓고 싸울 것이 아니라 오늘의 정쟁의 난맥상을 어떻게 풀고, 엉클어진 사회의 기강을 어떻게 바로잡고, 그리고 가라앉는 경제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를 높은 자리에서 종합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그러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최:대통령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서지 못하고 늘 흔들린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리더십의 요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요.

▶남:저는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요건에는 최소한 다섯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가이념과 목표를 강조하여 국민통합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국가문제 해결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셋째는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스템을 창출하고, 넷째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행정조직의 능률을 극대화 하며, 다섯째로 소수 반대 의견을 극복하고 창조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지금은 국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국가이념이 좌파의 도전을 받고 있고, 지금의 형편에서 국가경영의 우선 순위가 시민혁명에 있다는 말 같이 들립니다. 대통령은 정신적 구심점을 제시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예를 들어 자유와 평화 등등 국가적인 목표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합니다. 우리 대통령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최:우리 경제상태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남: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경제 난국은 신용카드 파동으로 인한 소비 격감, 정치.사회 불안 및 노사분규 등으로 민간의 국내투자 및 외국 투자의 현저한 감소, 생산시설의 해외이전, 그에 따르는 산업 공동화, 성장률 하락, 실업증가 등으로 집약됩니다. 다만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어 큰 다행인데 이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위기적 현상이 해외요인이 아니라 국내요인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해의 전망으로는 세계경제가 다소 호전되는 기미가 있고 바닥을 친 상품 재고를 복원하기 위한 재고투자 및 건설 투자가 경기 회복을 다소 부추길 전망이나 지난 수년간 투자가 저조했던 탓으로 잠재 성장률이 낮아졌고 실업 증가로 소비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반짝경기에 불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최: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도약하고 있는데 우리 재래산업은 거의 모두 중국과 경쟁하기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남:경제학에서는 생산의 3요소라 하여 토지.노동.자본을 들었는데 이 세가지 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국 푸둥에서 물어보니 토지가 국유니까 50~60년 장기임대가 쉽고, 임대료도 한번에 계산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저 주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노동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본에 있어서도 중국은 외국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모든 방책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외국 투자가 감소 추세에 있고 국내 저축률 (GDP 대비) 및 투자율도 감소 추세에 있습니다. 다만 현대 경제학에서는 기술을 생산의 제4요소로 보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만이라도 우리는 기필코 우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술이라 함은 이공학적 기술뿐 아니라 관리 능력.서비스와 같은 인간적.문화적 요인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최: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상식적으로 세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술을 개발하여 재래상품을 질적으로 차별화하는 것입니다. 그 성공 사례의 하나가 삼성의 휴대전화입니다. 중국.유럽에서 삼성 휴대전화가 없어서 못 파는 이유는 제품을 고급화.차별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섬유산업을 들 수 있습니다. 섬유산업을 사양산업이라 하였는데 아직도 섬유는 전기.전자상품 다음 제2위의 수출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한류로 제품을 차별화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둘째의 길은 니즈(needs)를 찾아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충족되지 않은 니즈는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중국이 제 아무리 모든 것을 생산한다 하더라도 약점이 있고 단점도 있고 우리가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셋째는 서비스 산업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한국을 동북아 물류중심지로 만들자는 구상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관광산업을 개발해야 합니다. 중국인들의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국외로 나옵니다.

▶최:그래서 한국이 동북아 경제중심지가 되도록 하자는 운동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남:저는 '동북아 중심국가'니'동북아 경제중심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쓸데없이 인근 국가를 자극할 우려가 있습니다. 저는 다만 우리의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인천.평택.광양.부산 등을 물류 중심지로 개발하면 그 곳으로 자연히 각종 비즈니스 및 생산시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경제 중심이 될 수 있다고 할 뿐입니다. 본인이 물류중심지 개발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를 지렛대로 하여 점진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경제개혁을 실현하자는 것입니다. 과거의 수출 제1주의가 그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경제자유지역 등 정말로 기업하기 좋은 지역을 우선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물류 중심지가 경제 전략의 거점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편리.친절.저렴이라는 원칙으로 인천.광양.부산 등의 관리 시스템을 혁신해야 합니다.

정리=김승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남덕우 전 총리는=1969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재무부 장관(24대)과 경제부총리(12대)를 연이어 지내며 70년대 고도 경제성장 정책을 주도한 개발시대의 대표적인 경제 관료다. 2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내년이면 80세다.

▶국민대.서강대 교수▶재무부 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한국무역협회장▶전경련 원로자문▶한국산학협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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