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무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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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평소에 무협소설을 즐겨 읽었다. 정통소설을 읽기에도 시간이 모자랄텐데 황당한 무협지는 왜 읽느냐는 친구들의 비난에 그는 자못 심각하게 무협소설 옹호론을 편 적이 있었다.
오랜 기억이지만 그의 옹호론을 요약하면 「무협지의 소설적 상상력은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뛰어나다」「일반소설과 달리 무협지에는 신·의·애와 그 반대요소인 불신·불의·증오가 기묘한 갈등과 조화를 이루며 구체적 삶의 모습을 소설공간에서 재현시키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다.
김광주선생의 정협지가 60년대초 신문에 연재되면서 중국 무협지가 본격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읽혀진지도 어언 30년의 세월이 되었다. 이젠 무협지를 그냥 심심파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무협소설의 방식을 따라 독특한 형태의 문학세계를 구축하는 젊은 작가들이 나오고 있다.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되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의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무림계는 낙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인 유하의 시집 『무림일기』는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면서 5공이 시작되는 정치적 혼란기를 무협지의 독특한 용어와 기발한 해학으로 무림의 세계에 비춰 기술하고 있다. 다시 6공말기에 이르러 예측할 수 없는 대선을 둘러싼 정치상황을 무협지 기법으로 예측하고 구성하는 소설이 등장했다. 김영하라는 젊은 대학원생이 『월간중앙』에 연재하고 있는 소설 『대권무림』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공삼거사,대중검자,정대인,월계검,종찬소자 등 천하의 절정고수들이 중원의 패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정치풍자극이 해학과 비유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고 있다.
워낙 우리네 정치판이 대권을 좇는 무사들의 분별없는 칼부림같기 때문에 황당한 무협지의 희극적 소재가 될만큼 타락했다는 깊은 반성이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읽혀온 무협소설의 영향이 독특한 문학의 한 장르를 이루는 새 변화의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게 되었다.<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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