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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앞만보고 내달렸던 "승부사" |방정희 행동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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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정희대통령은 서부영화와 일본의 사무라이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이때문에 지금까지도 전해내려오는 확인되지 않은 우스갯소리가 있다.
『대통령의 취향에 따라 청와대의 측근들은 볼만한 서부영화가 들어오면 얼른 필름을 구해다 바쳤다. 한번은 「미드나이트 카우보이」라는 영화가 수입됐고 제목의 「카우보이」때문에 서부영화로 오인돼 역시 청와대로 올려졌다. 박대통렴이 휴식을 겸해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웬걸, 무대가 현대 미국도시인데다 남창(존 보이트)과 절름발이(더스틴 호프먼)가 어울려 돌아다니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 대통령이 대경실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그때까지 이 영화를 상영중이던 국내 개봉관들은 예정보다 빨리 프로를 갈아 끼워야 했다….』
박대통령의 영화취향은 그의 내면세계의 일단을 엿볼수 있게 한다. 특히 사무라이영화에 대한 애착은 매우 시사적이다. 일본영화의 수입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금기였던 당시 일본에 파견돼 있던 중앙정보부요원, 즉 「남산공사」들은 볼만한 영화를 선정해 외교파우치편으로 필름을 청와대로 보내는 일이 중요한 임무에 속했다. 전직 중정간부 C씨는 『일본에 근무할 때 사무라이영화나 메이지유신 전후를 소재로 한 영화·TV드라마는 거의 다 사모아 고국에 보냈었다』고 회고했다.

<중정요원이 보내>
그러나 박대통령은 일본영화를 관람하는 시간과 장소만큼은 스스로 엄격히 자제했던 것 같다. 외아들 박지만씨의 기억. 『청와대에서 이따금 온가족이 모여 영화를 감상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부영화도 자주 등장했지요. 어쩌다 애정영화가 상영될 때면 아버님은 그 연세에도 자식들과 함께 그런 영화를 보는 일을 아주 쑥스러워 하곤 하셨어요 .아버님이 사무라이영화를 좋아하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무라이영화는 1년에 단 한번, 여름휴가때 진해별장에서만 감상하셨어요. 저도 곁에서 함께 보곤 했는데 아버님께서 일어를 모르는 제게 영화내용을 들려 주시곤 했지요. 그러면서 「일본놈들한테서도 배울 점은 많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박대통령을 유교식의 가부장적 통치관과 함께 사무라이적 사생관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출신배경과 일제하에서의 사범학교·사관학교 교육, 그리고 만군장교생활 탓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또 선동가형이기 보다는 강한 추진력의 행정가형·실무형의 지도자로 꼽힌다. 대중적인 인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직업정치인들을 마음속 깊이 경멸하고 있었다.
5·16거사 자체에 대해서는 혁명이다, 아니다 쿠데타다 하는 논란의 소지가 아직 많다. 그러나 5·16이후 박대통령이 그만의 결단력으로 이룬 업적은 적지 않은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가위 혁명적이었다. 「혁명가 박정희」라는 수사도 이 때문에 가능하다.
22세인 1939년 만주행을 결심한 이래 박정희는 김재상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많은 결단을 내렸다. 그중 5·16은 가장 큰 분수령이었다.
군인시절의 박정희장교는 당시 군대사회의 부패상에 항상 비분강개하는 쪽이었다.

<군부패 보고 분개>
그와 함께 오랫동안 근무하다 후에 혁명주체로 5·16에 가담한 김재춘씨(65·현 한중예술연합회장)는 당시 군대분위기를 다음과 같은 일화로 설명했다.
『1951년 봄 박정희대령이 9사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최모준장이 사단장이었지요.육사6기인 김시진소령(뒤에 청와대민정수석·89년작고)이 사단의 헌법부장으로 부임해 왔어요. 전쟁중이라 최사단장도 막사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금방 도착한 김소령이 그 막사앞을 지나다 사단장과 마주쳤지요. 김소령은 차렷자세로 관등성명을 대고 신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최준장은 첫마디로 「너 이××, 동해안에 가면 펄펄 뛰는 생선이 많은데 헌병이란 자가 그런 것도 안 가져오고 뭐하나」고 고함을 치더군요. 당시 부대는 강원도 영서지방 산골에 있었는데 김소령은 순전하게도 그날 바로 부하헌병을 시켜 대관령을 넘게 했어요. 강릉 바닷가에서 싱싱한 생선을 구해와서 회를 치고 술과 초고추장을 준비해 조촐하게 한상 차린 겁니다. 저녁때 김소령이 술상을 들고 사단장 막사로 들어갔는데 잠시후 와장창하는 소리가 요란합디다. 그릇깨지는 소리에 고함이 섞이고 해서 무슨 영문인가 했지요. 김소령이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막사를 나서는 것을 박정희참모장이 보고 까닭을 물었지요. 사단장이 김소령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러더랍니다. 「이 멍청아, 내가 언제 죽은 생선 먹겠다고 했어」라고요. 생선 운운한게 애초부터 술집작부를 구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지휘관이 군내에 상당수였으니 박참모장이 한번 눈 딱감고 칼을 빼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김재춘씨는 『아마 박대통령은 그때 김시진소령이 때묻지 않은 사람인 것을 처음 알아보고 뒤에 청와대비서관에까지 중용했을 것』이라고 덧불였다. 청렴·강직하면서 매사를 실용성 여부로 파악한 박정희장군의 눈에는 그렇지 않아도 입만 살아 있는 것처럼 비치는데다 이권에까지 민감한 정치가들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정치인, 나아가 언론인에 대한 박대통령의 이같은 사시 내지 경시눈 그의 통치기간중에도 내내 지속됐고, 결국 박정권에 대한 결정적인 올가미로 작용했다.
박대통령과 동갑나이인 원로야당정치인 박병배씨(75·현 현지회고문)는 『박정희는 군인시절부터 국회의원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 『박정희장군은 근본적으로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신 국회의원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브로커나 사기꾼 보듯 했어요. 어쨌든 그 사람이 책임자로 있는 부대는 국정감사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만큼 깨끗하기로 정평이 있었기 때문인지요.』

<「번의대장」별명도>
자유당 말기이던 당시 박의원은 국회 국방위원중 유일한 무소속의원이었다. 입담이 걸쑥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강원도경찰국장 시절 이 지역 5사단장이던 박장군과 친분을 맺었던 사이였다. 박의원은 박장군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할때 이례적으로 취임식에 참석해 축사를 해 주고 박사령관의 초대로 동래의 한 여관에서 단둘이 정종을 30병 가까이 폭음하며 시국을 개탄한 일도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시국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어디까지나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한 박의원과 그즈음 서서치 정권장악을 도모하고 있던 박장군은 의견일치를 볼 수가 없었다. 얼마후 한쪽은 최고권력자로 탈바꿈했고, 한쪽은 여전히 야당정치인으로 남았다.
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은 일생일대의 결단으로 정권을 탈취했다. 사무라이식 용어로 「진검승부 (신켄쇼부)」를 벌여 이긴 셈이었다. 이날부터 18년간 그는 때로는 권력강화를 위해, 때로는 국내외가 한결같이 반대하고 비웃는 경제개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 없이 승부수를 던졌다.
혁평 다음해인 62년 단행했던 2차 통화개혁이 미국의 비협조때문에 실패로 끌났을 때 그는 통음끝에 최고회의 건물안에서 구토까지 했다고 한다. 민정이양을 앞두고는 자신의 대통령선거 출마여부로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이다 한때 「번의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어 눋기도 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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