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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움트는 사모주식펀드 토종자본으로 꽃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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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내 금융회사나 기업이 외국인들 손에 속속 넘어가는 것을 우리 돈으로 막아보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른바 '토종 금융자본 육성론'이다. 구체적 수단으로는 '사모주식펀드'가 떠오르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던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우리금융지주를 인수 타깃으로 하는 수조원 규모의 사모펀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헌재 펀드'외에 삼성증권.미래에셋 등 증권회사들도 사모주식펀드 설정을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국내 금융산업이 가야 할 방향"이란 긍정적 평가가 많다. 그러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이벤트성 펀드 조성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경계론도 나오고 있다.

◆왜 사모펀드인가=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을 인수해 외국계 은행으로 만든 뉴브리지와 론스타 같은 외국 자본이 바로 사모주식펀드다. 이들은 시티나 HSBC 같은 금융회사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사모펀드는 금융업을 통해 돈을 벌기보다는 인수한 회사의 가치를 높인 뒤 되팔아 차익을 얻는 게 주된 관심사다.

이헌재 펀드의 조성을 위해 기관들과 접촉하고 있는 김영재(전 금감위 대변인) 솔로몬금융 회장은 "선진 금융기법과는 상관없이 단기 차익만 노리는 펀드에 국내 금융회사를 더 이상 넘겨선 곤란하다는 생각에서 국내 '대항마'를 만들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2000년 사모주식펀드 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펀드당 자금조성 규모가 수백억원 단위에 불과해 대형 금융회사 인수전에는 전혀 끼어들지 못했다.

사모펀드에 돈을 댈 투자자들의 인식 부족과 펀드 운용의 노하우 부족 등 취약한 여건도 있었지만, 정부의 규제가 더 큰 문제였다. 국내 사모펀드는 투자 대상 주식과 지분 한도 등의 제한을 받으며, 주식 운용을 위해선 수십억원의 돈을 넣어 별도 자산운용사를 만들어야 한다. 또 금융회사 주식을 투자대상으로 할 경우 산업자본의 펀드 참여가 제한된다.

이에 비해 론스타 등 외국의 사모펀드는 이같은 규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다.

정부도 뒤늦게 이런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나섰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달 초 "국내 사모주식펀드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재경부 관계자는 "외국 자본을 배척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내 자본에 대한 역차별을 줄여 균형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시장여건도 무르익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융연구원 강종만 연구위원은 "저금리 상태에서 4백조원이 넘는 여유자금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떠돌고 있다"며 "사모주식펀드는 몇해 전 투자열풍을 몰고 왔던 벤처펀드보다 훨씬 더 안전한 투자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풀어야 할 과제=국내 부동자금은 많지만 과연 3~5년 뒤를 바라보는 장기투자에 선듯 나설 투자자가 얼마나 나올지가 관건이다. 이영두 인핸스먼트컨설팅 대표는 "수천억~수조원 규모에 달하는 대형 사모펀드가 조성되기 위해선 연기금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며 "그러나 국내에선 연기금의 주식투자가 사실상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재경부는 최근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전면 허용하는 내용의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의원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영두 대표는 "미국의 사모펀드는 연기금의 참여 비중이 50~70%에 달한다"며 "연기금이 중심에 서고 다른 투자자들이 가세하는 형태로 펀드가 조성된다"고 설명했다.

산업자본의 은행업 투자제한도 문제다. 김석중 교보증권 상무는 "연기금이 안되면 기업들의 여유자금이라도 많이 들어와야 하지만, 한 기업이 은행 지분을 4% 이상 취득할 수 없도록 만든 규제가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金상무는 "사모펀드를 제대로 육성하려면 자금의 출처를 묻지 않으면서 사후적인 불공정 행위만 감시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김영수 린앤킴투자자문 대표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선 신뢰할 만한 트랙 레코더(과거의 투자성공 사례들)가 있어야 하지만 국내엔 그런 주체가 별로 없다"며 "초기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서서히 트랙 레코더를 쌓아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광기 기자

◆사모주식펀드(Private Equity Fund.PEF)=소수의 거액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장기로 조달한 뒤 주식이나 부동산.부실채권 등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노리는 펀드를 말한다. 대개 1백명 이하 투자자가 모이며 누가 투자했는지 공개되지 않는다.

기업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 경영권까지 손에 넣어 기업가치를 높인 뒤 되팔기도 한다. 기업경영에 일정 기간 간여하는 만큼 펀드의 투자기간도 3~5년 이상으로 길다. 미국의 경우 PEF는 연 평균 30% 정도의 수익을 목표로 만들어진다. 소수의 투자자가 모이는 조합 형태의 투자클럽인 만큼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펀드와 달리 금융감독당국의 규제에서 훨씬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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