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악플러의 분탕질 … 그래도 금아는 웃고 있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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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금아(琴兒) 피천득(1910~2007) 선생이 별세한 지난달 25일 자정 녘. 인터넷 포털사이트마다 '후장대'란 단어가 인기 검색어 순위에 등장했다. 금아가 중국 후장대 출신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처음엔 사이버 공간에도 금아를 추모하는 마음이 가득한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수천 건의 인터넷 댓글에 애도의 마음 따위는 없었다. '후장대'란 단어의 발음을 갖고 네티즌들은 온갖 장난질을 해대고 있었다. 옮겨 적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지난달 29일 영결식 뒤에 다시 인터넷을 뒤져봤다. 철부지 장난기가 이제는 잦아들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금아는 여전히 놀림감이었다. 한 번 발동한 장난기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네티즌은 금아를 친일파로 부르고 있었다. 금아가 경성대 교수(45~46년)를 역임한 사실이 유일한 근거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일부 네티즌은 금아의 이름, 그러니까 '천득'이란 이름으로 아예 분탕질을 하고 있었다.

금아는 29년 중국 상하이 후장대(江大)에 입학해 37년 졸업했다. 후장대는 일제강점기 한국 문인들과 인연이 깊은 학교다. 연극인 이해랑, 소설가 주요한.주요섭.현진건 등이 이 학교 동문이다. 특히 주요섭은 금아와 유학시절을 함께한 사이다. 주요섭의 명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모티브는 금아의 가족 이야기였다. 금아가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서울집 얘기를 주요섭에게 들려준 것이었다.

금아의 출신 학교가 우스꽝스럽게 발음된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렇게 희희덕거릴 만한 일인가. 친일파 소동은 또 무엇인가. 영결식에서 대표조사를 읽은 이는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였다. 그는 조사에서 "고인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 소임을 다했다"라고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해마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을 위한 행사를 벌인다. 올해는 1907년생 차례였다. 3년만 더 있으면 생존 작가의 첫 100주년 행사를 열 수 있다고, 올 초 문단은 들떠 있었다. 금아는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존재였다. 네티즌에게 바란다. 망자(亡者)에게 최소한의 예의만이라도 갖추시라.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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