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프락치 사건 "이승만정권의 정치공작"|서울대 박사논문서 백운선씨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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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잘 알려진 제헌국회내 소장파의원들에 대한 본격적 연구논문이 처음으로 나왔다.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 백운선씨는 박사학위논문「제헌국회내 소장파에관한 연구」에서「국회 프락치사건」을 이승만정권이 소장파의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공작이라고 보고 반냉전·통일지향적인 소장파가 국회내에서 축출됨에 따라 분단 고정화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국적 권위주의 통치의 강압성이 생성됐다는 등 소장파의원들의 활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다.
이 논문에 대해 서울대 김영국교수(정치학과)는 『제헌국회에 대해서는 그동안 개설적인 연구만 있어 왔는데 이번에 원내세력 분포 등 심층적 연구가 이루어지게 됐고 좌경·용공으로 몰려 금기시돼 왔던 소장파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논문을 요약, 소개한다.
제헌국회내의 세칭 소장파 집단은 국회개원후 평화적남북통일과 자주독립, 그리고 균등사회 건설을 이념으로 내세우고 무소속 구락부로 결집된 이래 1949년「국회프락치사건」으로 사실상 붕괴될 때까지 의회내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견실한 응집력과 동질성을 보여준 정파였다. 이들은 당시 원내에서 대정부공격을 주도했던 진보집단으로 그 활동기의 정치국면에서 무시못할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소장파의원의 구성규모는 국회내에서 보여준 집단행동의 참여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적게는 30l명, 많게는 80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1회 국회에 이어 2회 국회에서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결집력도 높아지는데 이는 이승만정부가 이들에 대한 대응의 긴박성을 높여주는 정황이 되기도 했다.
1949년 5월20일 소장파 세의원(이문헌·최태규·이구수)의 국가보안법위반혐의 체포를 시작으로 전개된 프락치정국은 정치세력의 재편과 체제의 공고화를 위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다. 소장파세력의 몰락은 넓게는 기득권 방호와 반공체제의 공고화를 내용으로하는 분단고착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제도권내의 최대 저항세력이 제거됐음을 의미하며 좁게는 핵심권력으로서의 정권세력과 주변권력으로서의 의회 사이에 이루어져 왔던 힘의 대칭관계가 무너 졌음을 의미한다. <김상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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