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창간 27돌…되짚어본 생활상|월급쟁이 27년 윤재우<삼성생명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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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중앙일보가 창간되던 때만 해도 극럴 듯한 직장을 구한다는 일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라 살림이래야 1인당국민소득 1백5달러. 64년 1억달러 수출로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이 솟구쳤지만 공채를 치르는 곳이라고는 삼성·천우사·삼호등 대기업 3곳과 은행이 고작이었다.
직장이 워낙 귀하다보니 알음알음으로 중소기업에 일자리를 구해야했고 일류대학 출신이라 해도 취직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고등룸멘」으로 담배꽁초 연기 속에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월급쟁이 27년에 삼성생명 부사장에 오른 윤재우씨(52)는 서울대상과대 경제과를 졸업하던 65년12월 고등고시만큼이나 어렵다(?)는 삼성공채시험에 합격했다. 총합격자는 1백20명.
예나 지금이나 교육에 철저한 삼성그룹은 40여일간의 신입사원연수가 끝난다음 날인 설날오후 윤씨를 계열사 울산공장으로 발령냈다.
싫다는 내색도 못하고 동료 5명과 도착한 곳은 제임스 딘 주연 영화 『자이언트』의 한장면 만큼이나 황량했다. 달랑 기숙사만 딸린, 서부개척시대의 미국텍사스 유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윤씨는 작업복차림에 회사배지만 달아도 울산바닥에선 척척 외상을 주는 등「알아주는」통에 객지의 어려움을 달랠 수 있었다.
첫 월급은 당시 서울시내 양복점에서 양복 두벌을 맞춰 입을 수 있는 값인 1만5천원.
2년 남짓 지방근무를 마치고 상경한 윤씨는 제일제당으로 옮긴지 2년 만인 29세의 나이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당시만 해도사회 전체적으로 각 분야의 승진속도가 빨랐다.
별을 보고 출근했다 별을 보고 퇴근하던 70년대 직장인들의 유일한 낙은 퇴근길의 한잔 술.
동료들과 어울려 무교동·명동의 소주집과 극장식 식당을 넘나들며 2차, 3차로 이어져 밤이 으슥할 무렵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서야 통행금지에 쫓겨 총알 택시에 몸을 실었다.
도심재개발사업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지만 한국은행 뒤 북창탕은 간밤의 숙취를 푸는 월급생활자들의 휴식처였다.
술값도 싸고 물가도 그리 비싸지 않던 시절 회사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집장만.
꼬박꼬박 저축하고 회사지원금과 은행융자를 잘만 챙기면 입사 5년쯤 서울변두리에 방3개짜리 30평 단독주택은 족히 마련할 수 있었다.
윤씨는 입사후 4년간 허리띠를 졸라맨 끝에 전농동 대지 30평의 주택을 1백90만원에 장만했다. 그 집이 밑천이 돼 상도동 등 몇 곳을 더 거쳐 안국화재 부장시절인 73년 구반포아파트에 입주했다. 당시로선 주거·재산가치 양면에서 아파트가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아 미분양으로 시공업자가 애를 먹던 시기.
금싸라기 땅이 지천에 널려있고 으레 부유층들의 주거지로 알려진 강남은 70년대 중반까지 일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허허벌판이었다.
윤씨가 30대 후반까지 예비군훈련을 받던 신사동 일대는 비만 오면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질퍽거렸고 드문드문 야산사이로 도시계획상 뻥 뚫린 비포장도로가 나 있었다.
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크게 뛴 물가는 20%대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한자리 수로 자리를 잡았지만 봉급생활자의 풍속도는 엄청나게 달라졌다.삼성코닝 전무였던 87년 사회를 급변시킨 민주화열풍의 여파는 그대로 근로자들의 생활에 전달됐다.
「마이카」「오너 드라이버」들이 속출했고 회사단위의 야유회가 극기훈련으로 바뀌면서 등산·낚시등 직장동호인 모임이 유행처럼 번졌다.
음주문화도 크게 변화, 직장상사가 모처럼 술한잔 사려해도. 직접 운전에 가족과 함께 지내려는 탓에 선뜻 나서는 부하직원이 드물다.
빈털터리 호주머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먼저 내겠다며 계산대 앞에서 승강이를 벌이던 모습도 오간데 없고 애인사이에도 「각자 내기」가 유행이다.
『흘러간 옛 시절의 낭만 중 요즘도 쓸만한 것들이 꽤 있어요』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윤씨의 회상이다.

<김기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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