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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협에 기대감 “실낱 변화”/평양 3박4일 인상기/김영배통일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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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일감정 높이며 미엔 “조건부 용서”/체제유지­개방 필요성 사이서 갈등
「통일거리」를 통해 들어선 평양은 이미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판문점에서 꼭 두시간. 8차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따라 개성∼평양간 고속도로를 거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은 평양은 이미 몇번이나 와보았던 것 같은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남북간의 대화와 왕래가 시작된 동안 연 1천1백명의 남북인사들이 서로 오가며 TV로,사진으로,글로 소개됐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과 평양은 그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보시오,지금 2계단 공사가 한창이지요. 앞으로 3만호를 더 지을 것이오.』
안내원은 열을 올리며 신도시 건설현장과 흡사한 통일거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평양축전을 전후해 세워진 광복거리와 함께 평양의 2대 뉴타운이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평양거리는 우중충한,모스크바를 닮다만듯한 시골도시와 다를바 없다. 남새(채소)상점,물고기상점,식료품상점…. 아래층에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살림집과 단층의 가게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적한 시골길 같은 길 옆으로는 제법 시민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선도차를 앞세운 차량 20여대의 대표단 자동차 행렬에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었다. 『아,남북대표들이 몇차례 오갔지만 통일에 실질적으로 기여한게 없으니까 그렇지요』
안내원들의 설명도 천편일률적이다.
남쪽 정부 당국 대표들을 언제나처럼 「정중히 환대」한다는 명목으로 시내에서 떨어진 주석궁 옆의 백화원 초대소에 「격리수용」됐다.
복도 양쪽 입구에는 안내원이 책상을 가져다 놓고 지키고 잠시만 방을 비웠다 돌아와도 한번 쓴 수건들을 새것으로 바꾸어 가지런히 다시 제자리에 정리해두고 냉장고도 다시 채워놓는 「극진한 관리」가 오히려 숨막히게 했다.
회담장인 인민문화궁전에서 달러로 북한우표를 샀던 우리 기자나 수행원들은 거스름으로 「외화와 바꿔주는 돈표」를 받거나 얼마전 화폐개혁으로 새로 나온 새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큰 소동을 빚었다. 돈표는 그렇다 치더라도 새 돈은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북측은 우리측이 받아간 것으로 파악한 30원80전의 새돈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엄중경고 해왔고 우리측은 출발 하루 전날 밤 이를 되찾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깥 세상으로부터 차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신문에 한줄도 나지 않았던 한중수교에 대해 대표단 방북 직전에야 부랴부랴 「교육」시켰던 것 같다. 안내원중에는 내부방송(각 가정마다 설치되어 있는 확성기를 통한 방송)을 통해 보도가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그렇지 않고 소문으로 들었다는 사람 등 가지가지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것은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며 더 이상 이야기를 피하려 했다.
안내원에게 물어봤다. 『이봐,황영조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거 알아.』 농구를 했고 체육에 관심이 많다는 경공업대 연구원이라는 안내원은 『뭐. 내가 들은 것 하고 전혀 다른데』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전대협 얘기를 꺼내는 33세의 이 6·25 이후 전후세대에겐 당이 가르친 것에 대한 의심은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징후는 평양 제일고등중학교에 갔을때 더 현장감 있게 느껴져 왔다.
전기실험중이던 한 중학 6년생은 『우리에겐 이인모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 같은데 7차회담에서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왜 지키지 않습네까』며 소리를 질러댔다. 김정일이 1984년 4월28일 다녀갔다는 음악연습실에서는 소조활동중인 여학생들이 『고향의 봄』을 계속 연주하고 전자계산실의 중학6년생도 NEC 일제컴퓨터에 악보를 입력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틀고 있었다.
이들은 폐쇄된 사상의 미망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선 과연 남북간의 교류확대를 통한 개방을 모색하고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허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변화의 기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간에는 정치문제의 해결이 제일 중요하다는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도 그 강도는 예전같지가 않았다. 『우중이는 곧 온다』며 『부총리는 언제 오기로 했냐』는 그들의 말에는 남북경협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들에게 평양시외의 남포를 둘러보게 한 것도 아마 그런 배려였을 것이다.
북한방송들은 일본에 대해 맹렬히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할머니들은 『쪽발이들이 가랭이를…』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욕을 퍼부었다. 북측 인사들이 미국에 대해선 드러내놓고 『과거를 반성하면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일본에 욕설을 퍼붓는 것은 그들의 대미·대일 자세변화를 드러내는 한 반증일 것이다.
휘황한 불빛의 목란관과 그들이 자랑하는 왕재산 경음악단,미니스커트를 입은 가수,연일 TV에 비치는 거동이 불편한듯한 김일성,우리 주변의 시골스런 북한인들…,이런 것들이 오늘의 부조화스러운 북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북한 내에서는 이런 개방과 변화에 대한 반발이 여전히 강하다. 3개 부속합의서를 가까스로 타결지었던 17일 밤 목란관 만찬에서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다시 정치협상 회의의 선결을 들고 나온 것도 반드시 북한주민을 의식한 내부용 발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정치분야 부속합의서를 북측에는 미흡한대로 타결시켜버린 연형묵총리 등 고위급회담 대표들을 앞에 앉혀놓고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체제유지라는 명분과 개방의 필요성이라는 현실속에서 북이 겪고 있는 갈등을 현장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북의 변화는 완만하고 진통이 클 것이다. 그렇지만 이 느릿느릿 하고 가라앉아 있는 평양의 어느 구속에선가 그런 바람은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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