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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간 총리입장 고려했어야…/전영기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관권선거 문제로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17일 김영삼민자당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한 수습책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그는 연기군에서 관권선거가 일어난 점에 대해 집권당 총재로서 사죄한다고 말하고 선거중립 내각의 성격을 띠는 「대담한 개각」을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또 관권선거 가능성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차단하겠다고 했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내각이 임명권자가 아닌 그가 개각의 범위와 성격을 천명하는 것은 대통령후보인 집권당 총재와 현직 대통령으로 권력이 2원화된 우리 정치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이상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김 총재로서는 국민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일들을 자신이 주도하고 싶은 생각이 있을테지만 대통령과 여당 총재는 갈등관계에 있다기보다 상호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이 더 상식적이다.
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개각의 내용에 남북회담차 평양에 가 있는 정원식총리가 포함될 수 있음을 암시한 대목이다. 김 총재는 명시적으로 정 총리가 개각대상에 포함된다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정 총리가 평양에 가 있기 때문에(경질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해 그의 교체를 강력히 시사했다. 김 총재의 측근들은 내놓고 정 총리의 경질을 얘기했었다.
정 총리가 한창 평양에서 남북문제를 놓고 연형묵 북한 총리와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을 그 시점에 서울에서는 여권의 제2인자가 정 총리의 교체 가능성을 흘리고 있었으니 북한측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곧 바뀌게 될 정 총리와의 협상에 무게를 실을 수 없다고 지레 판단하지는 않았을까. 김 총재는 자신의 개혁이미지를 고양하려다 엉뚱하게 남북회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발언을 한 것이다.
김 총재의 관권선거 수습기자회견은 어디까지나 국내 정치문제다. 고감도 남북협상이 국내 정치행위에 의해 만의 하나라도 훼손되는 일이 있다면 국민의 입장에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정치지도자의 언행이 선거득표를 기준으로만 이뤄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는 씁쓰레한 예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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