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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연기 안된다(권영빈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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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는 만 10년이 넘게 같은 집에서 같은 직장을 왕래하는 길을 따라 손수운전을 해왔다. 불과 3∼4년전만해도 아침 8시에 집을 나서면 20분후엔 회사에 도착하는 거리였다. 1년전부터 출근 시간이 30분 앞당겨졌고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는 15분을 또 앞당긴 7시15분이전에 집을 나서지 않고서는 몇시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수 없게끔 되어버렸다.
○출근시간 계속 앞당겨
지난 10년간 자동차대수가 50여만대에서 3백60여만대로 6.9배가 늘어난 반면 도로의 길이는 1.2배가 는데 그쳤다. 이중 70%이상이 승용차라면 교통지옥의 대부분 책임은 승용차 보유자들이 자초한 결과라 반성할 일이다. 물론 도로건설과 확장을 등한시한 정부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이미 도시계획이 끝나버린 서울도심의 거리를 더 넓게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96년 자동차가 8백60만대,2001년에 1천2백만대로 늘어난다면 설령 아무리 도로를 늘린다해도 현재보다 3배이상의 가혹한 교통지옥을 각오해야 한다는 전망이다. 이번 추석 전야의 고속도로 주행속도가 시속 6㎞였다면 앞으로는 그런 현상이 도심 곳곳에서 일상으로 일어난다고 예상할 수 밖에 없다.
진보적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일찌감치 이런 위험상황을 예고한 통계수치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전형적인 미국 남자는 깨어있는 16시간중 4시간을 차속에서,혹은 차를 몰기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소비하고 7천5백마일을 달리기 위해 연간 1천6백시간 이상을 자동차에 바침으로써 결국 평균 시속5마일의 자동차를 끌고 다닌다는 결론이다(『녹색평론』 6호 「파국을 향해가는 자동차」 참조).
자동차의 천국 미국이 이러할진대 우리의 교통사정도 조만간 같은 위기에 직면할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남이 자동차타기를 포기하기전에 나 자신이 차를 안타고 버려야 하는 각오를 해야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자각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교통대란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는 것이다.
○대중교통만이 해결책
그러나 승용차를 타지 않는다고 할때는 반드시 필수적인 전제가 따라야 한다. 승용차를 대신할 대체 교통수단없이 우리는 자동차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이 손수운전자들의 이런 비애와 고통을 풀어줄 수 있는가. 지극히 원론적인 대안이지만 대중교통의 확장이라는 길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지하철을 더 길고 더 세밀하게 연장하고,지상의 버스를 공영화 또는 지원방안을 통해 활성화하며,고속철도를 신설하는 길이다.
어떤 기기묘묘한 방법으로도 다가선 교통난을 해소할 획기적인 방안은 없을 것이다. 가장 원칙적인 방안을 지속적으로 과감히 추진하는 노력없이는 닥쳐온 교통위기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며칠전 분당·일산신도시 등의 수도권 전철공사가 공비부족으로 1∼2년 연기될 수 밖에 없다는 보도가 나왔다. 어떻게 이런 결정이 그토록 쉽게 내려지고 아무일없이 넘어갈 수 있는지 도저히 보통사람들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2백만호 건립 자체가 무리라는 비판이 나왔을때도 정부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 가능성은 실제로 현실화되는듯 했다. 분당·일산 등 신도시 교통난이 가장 큰 문제라는 비판이 나왔을때도 정부 당국은 지하철로 그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신도시 입주자들은 설마 정부가 저토록 장담하고 다짐했는데 교통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겠느냐고 믿고 모두 입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1∼2년 연기라는 말이 그렇게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인가. 말이 1∼2년이지 하루 하루를 교통지옥에서 사는 당사자들에겐 하루 하루가 지옥을 왕래하는 기분일 것이다. 연기의 사유인즉 공비를 분담할 토지개발공사나 주택공사의 사업비 증액분 납기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는 공비 조달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잘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이 있다면 오늘의 교통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지하철과 대중교통밖에 없고 정부가 주도한 신도시의 전철공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당초의 공기를 맞춰줘야만 정부의 신뢰를 최소한이나마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이 곧 교통난 해결의 구체적이고도 원천적인 방안임을 모두가 확신하게끔 지하철공사의 확장을 더욱 가속화해야 할 것이다.
○공기맞추는 일 급선무
이런 믿음을 정부가 앞장서 깨뜨린다면 누가 누굴 믿고 스스로 자가용 타는 일을 포기할 것인가.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신도시 전철을 공기내에 끝내고 이어 수도권전체의 지하철망을 확충하는 진취적 자세를 보여야만 우리의 교통대란은 조금씩 가라 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때 우리 손수운전자들은 자동차의 포로에서 벗어나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없이도 스스로 즐겨 핸들을 놓고 전철과 버스를 타고 출근하게 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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