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골」 깊어만 간다/일­러시아(탈냉전시대 새지역갈등: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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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방섬 갈등에 일 신규경원 중단/영토반환 압력에 「러」도 심기불편
구소련붕괴로 냉전체제를 벗어난 세계가 곳곳에서 새로운 갈등의 싹을 키우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무기판매·무역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국면을 보이는가 하면 북방4개섬 반환문제로 티격태격해 오던 일­러 양국은 옐친대통령의 갑작스런 방일취소로 주변국들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신나치세력의 준동과 함께 극우경향으로 기우는 조짐이 증폭되고 구소·유고연방의 지역·인종분쟁 또한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탈냉전후의 세계의 각 지역갈등을 조명해 본다.<편집자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방일(13일),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총리의 러시아방문(93년 1월),동경 서방선진7개국(G7) 정상회의(93년 7월)­.
미야자와총리가 북방4개섬 반환문제 해결을 위해 세워놓은 일련의 대러시아정책 시나리오다. 또 내달 28일부터 이틀동안 동경에서는 구소련지원회의가 열린다. 이것도 북방영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전력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는 외교스케줄의 하나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이같은 과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경제지원을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이번 방일도 옐친대통령이 먼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옐친대통령의 갑작스런 방일취소로 이같은 외교일정은 전면 재조정되게 됐다. 이에 따라 잇따른 정상회담과 북방4개섬 문제 진전을 통한 일본­러시아간 평화조약체결 등으로 전후문제를 완전 청산하려던 일본의 기대는 당분간 실현되기 어렵게 됐다.
구소련지원 동경회의나 동경G7정상회의야 예정대로 열릴 것이지만,북방 4개섬문제에서 아무런 진전이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일본은 대러시아 경제지원에서 거부자세를 취할 것이 분명하다.
옐친대통령의 방일연기는 미야자와정권과 일본에 큰 실망을 안겨줬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이번 사태로 더욱 러시아를 불신하게 됐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이 경제력을 동원,러시아에 영토반환 압력을 넣는데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옐친대통령은 이달초 러시아를 방문한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옹) 일본외상에게 이같은 불편한 심기를 밝히며,G7국가들 가운데 일본의 대러시아 지원이 가장 적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튼 이번 사태로 양국간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일본의 대러시아 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불쾌감도 쉽사리 가시지 않을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앞으로 러­일관계가 냉각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양국은 당분간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현 상황을 주시할 것으로 일본 언론은 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일관계가 지금보다 더 악화되거나 적대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일반적 분석이다.
냉전체제가 붕괴해버린 현재의 세계질서가 이들 양국이 서로 적대적인 상태로 남도록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제정치 상황은 일본이 어느정도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러시아도 일본의 경제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일본과 적대적일 수 없다. 다만 영토문제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대대적 지원은 예상할 수 없다.
미국은 구소련 개혁 지원이 미국외교의 중요과제라는 인식하에 러시아지원에 나서고 있다. 냉전체제하에서 일본의 북방4개섬 영유권을 지지해온 미국이지만 이 문제때문에 러시아의 안정이 위태롭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의 핵관리·민족문제·시장경제화·민주화·국제협조 등을 중시하고 있다. 유럽도 러시아의 안정을 중요시하고 있다. 러시아의 불안정은 곧바로 유럽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황에서 러시아에 대대적인 원조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이같은 상황들은 일본이 러시아지원에 발을 빼는 등 옐친 방일연기에 대한 보복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와타나베외상이 『옐친대통령이 오지 않는다 해서 대러시아차관 취소라든가 보복조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격앙됐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지금까지의 지원체제에 변화는 없다』며 냉정히 대처하겠다는 다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은 식량원조용 1억달러와 천연가스개발용 기계수출에 대한 7억달러의 수출보험인수 약속은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원자력발전소 안전훈련센터개설,군수산업 민수전환지원을 위한 조사단 파견 등도 계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과거에 지원을 약속했던 것들이며,옐친대통령의 방일을 맞아 준비중이던 새로운 프로젝트들은 보류됐다. 러시아개발을 위한 민간기업 참여도 훨씬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에너지·화학·자동차·항공 등 26개분야 1백30건 총4백억달러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이들 신규프로젝트는 당분간 실현되기 어렵다.<동경=이석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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