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해인사 전격 방문] "제가 오도가도 못할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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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대통령과 부인 권양숙여사가 22일 오전 경남 합천군 소재 해인사를 방문,조계종 종정인 법전스님(左)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이 22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전격 방문했다. 취임 후 사찰 방문은 처음이다. 더욱이 매주 한차례씩 월요일마다 주재하는 수석.보좌관 회의까지 포기하고 헬기를 이용해 급거 남하했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불교계와 별도로 접촉한 끝에 이날 오전 조계종 법전 종정과의 회동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盧대통령은 법전 종정과 만난 자리에서 사패산 터널 문제로 "제가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이 됐다"고 토로하며 도움을 청해 결국 법전 종정에게서 협조 메시지를 얻어냈다.

지난주 총무원이 정부가 사패산 문제로 불교계의 입장을 왜곡.폄하한다며 '종단적 차원의 저항'을 경고한 것에 비하면 뜻밖의 성과를 도출한 셈이다.

이를 위해 盧대통령은 시종 깍듯이 예우를 갖췄다. 특히 해인사 법보전에선 세번 절을 올리기도 했다.

이에 앞서 盧대통령은 법전 종정과 경내 퇴설당에서 환담을 나누면서 "삼배(三拜)를 드리면 마음도 좋고 복 받을까 싶은데, 나라 법도 법이라며 체면을 갖추라고 해서 큰절을 못 드려 마음이 무겁다"고 했었다. 그러나 동행한 권양숙 여사가 먼저 법보전에서 삼배를 한 뒤 盧대통령에게 절할 것을 권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이날 법전 종정은 盧대통령과의 회동 후 "동견(同見), 동리(同利)하는 미래 세계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뼈 있는' 편지 한장을 건넸다. 법전 종정은 편지에서 "…동견과 동리는 서로 참고 화합하고 공경함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국민을 묶을 수 있는 모든 이념적 목표들은 대화합을 전제로 합니다. 정치인은 자기절복(自己折伏)으로 모든 국민을 섭수하고 포용해 갈등을 통합하고 진정한 화합을 이뤄내야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인마저 하나의 이기집단으로 자기 목소리만을 낸 것이 현재의 모든 불화합의 근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경제 회복을 꾀하되 성장과 분배의 올바른 원칙을 확립해 국민 동의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빈부격차의 해소에 만전을 기하면서 소외된 계층을 살핀다면 이 역시 화합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이 산승은 대통령께서 국민 대화합의 근본 원칙을 세우고 실천할 능력과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적었다.

법전 종정은 또 盧대통령에게 '國正天心順 官淸民自安'(나라가 바르면 천심이 순응하고, 관청이 맑으면 백성은 스스로 편안하다)의 글도 선물했다. 약 1시간20분의 일정을 마친 뒤 해인사를 떠나는 盧대통령에게 불자 3백여명이 박수로 환송하자 盧대통령은 경상도 사투리로 "안녕히 계시이소"라고 말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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