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한다던 추경예산 왜 하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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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는 작년에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두가지를 국민에게 굳게 약속했다. 92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과 재정긴축 등을 통한 물가안정화 시책의 결실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정부의 단단한 결심은 금년도 경제운용계획을 내놓을 때도 거듭 천명되었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최근의 정책협의에서 추경예산편성의 불가피성을 거론하고 있다. 예년의 악습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또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당정은 추경 편성을 빌미로 논의가 유보되어 있는 대통령선거 정당 보조금을 계상해 이를 야당과의 협상카드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본 예산이 성립된 후에 생긴 사유로 말미암아 이에 변경을 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추경예산안을 짤 수도 있다. 가령 작년 세계잉여금에서 올해로 이월된 것중 국책이자와 차관상환,양곡관리기금 결손 보전 등을 하고 남은 3천여억원은 관련법에 따라 당연히 지방재정 교부금 등으로 넘겨줄 수 밖에 없다. 또 작년 예산통과후 발생한 정당 국고보조금도 추경으로 받아 넣어야 한다.
그런 것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문제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본예산의 편성시에 경비지출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추경으로 돌려 예산이 팽창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다. 아직도 논란이 분분한 대통령 선거자금의 국고보조를 추경항목으로 삽입하려는 것이나 작년 본예산이 국회에서 처리되고 난 다음 발생한 공무원의 증원과 이에 따른 인건비 증가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나서는 것 등이 문제다.
재정은 경제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대선을 앞두고 대야 협상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항목까지 살짝 끌어 넣어 추경을 편성하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이러다가는 또 무슨 사업비까지 포함시키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선거를 전후해서 통화정책도 「융통성 있게」 운용하고 내년 예산도 조금 헐렁하게 짜야 하느냐에 대해 논의가 일고 있는 마당에 금년 추경마저 이런 식이라면 이제 정부나 집권당의 말을 어찌 신뢰하겠는가.
예산이란 몇가지 원칙이 있다. 공개적이어야 하고 명료해야 하며 또 엄밀해야 한다. 경제관료들 마저 이런 원칙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예산의 효율성을 따져나갈 방법이 없다. 국회의 예산심의 기능이 불신받고 있는 상태라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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