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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화제작 없이 자리바꿈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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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길고 무더웠던 올해 미국의 여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답답하고 권태스러운 미국사람들의 심기를 반영하듯 이번 달『뉴욕 타임스』베스트셀러리스트의 소설분야는 새로운 책의 등장 없이 자리바꿈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달에 이어 스티븐 킹의『제럴드의 장난』이 계속 수위를 달리고 있다.
규방의 흥분을 돋우기 위한 장난으로 여주인공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결박되어 있다. 가까이 접근하는 남편 제럴드가 밉살스러워 발로 걷어차는데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제럴드는 심장마비가 나 죽어가고 있다.
한적한 호숫가 저택 주변엔 며칠 굶은 개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미친듯 헤매는데 멀리선 동력톱 작동하는 소리가들리는 가운데 꼼짝없이 침대에 묶여있는 그녀는 끔찍한 현실과 흉칙한 과거를 오가면서 발버둥친다는 이야기.
극한 상황에서의 성격묘사와 긴박감 있는 사태변화가 잘 묘사되어 있는 이 작품을 놓고 어떤 평론가는 킹이 도깨비이야기 작가에서 순수문학작가로 면모를 일신했다고 극찬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 입맛에는 안 맞는 이야기들이다.
인기 절정에 있는 율사 츨신 추리소설가 그리셈의『펠리컨소송의뢰서』는 올해 초부터 줄곧 이 리스트에 올라있는 롱셀러.
혼자 힘으로 거대한 적을 해치운다는 것은 아마도 미국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소재일 것
이다. 서부시대 총잡이의 후예쯤 되는 변호사가 단독으로 마파아 조직과 싸운다는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미국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중견 흑인 여류작가 맥밀런의『숨을 토해내길 기다리며』와 앨리스워커의『즐거움의 비밀을 가진다는 것』이 이 리스트에 계속 올라 있어 미국 독자들의 체면을 그나마 유지시켜주고 있다. 비소설분야에서는 세 종류의 새 책이 등장했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라드진스키의 『마지막 황제』를 들수 있다.
80여년의 소련공산당이 무너지면서 그 정권의 첫 희생자인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황제 니콜라스 2세와 그 가족의 처참한 죽음이 이제 아무 제약 없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안톤 체호프 다음으로 러시아에서 인기가 있다는 극작가인 저자가 70년대 학생시절 하숙집 주인으로부터 들은 마지막 왕조의 암살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제보에 힘입어 빛을 본 작품이다.
지금까지 이 사건을 다룬 출판물 중에선 제일이란 평을 받고 있으며 왕조는 암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역사까지는 죽일 수 없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참고로 러시아 역사 이해에 좋은 길잡이가 되는 몇가지 책을 소개한다.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로버트매시)=니콜라스 2세와 그 가족의 암살을 다룬 과거의베스트셀러. 1970년 이래 15판을 냈다. 『피터 대제』(로버트매시)-퓰리처상을 받은 책으로 러시아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대제의 전기. 현재까지 16판을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사』(존 로렌스)-간략한 러시아 역사책으로는 서구에서 가장 많이 읽힌다.
『러시아』(데이비드시플리)=『뉴욕타임스』모스크바지국장출신이 쓴 러시아 현대사.
놀랍게도 미국 민주당 부통령후보 고어 상원의원의『위기에 처해 있는 지구』는 계속 강세를 보이고 있다.
고어 상원의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적된 문제점에 대해유권자들이 적지 않게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평.
이번 여름기간의 필독도서로 추천한 바 있는『트루먼』『게티스버그의 링컨』, 그리고 서로교수의『머리 대 머리』가 건재하라는 것을 특기하고 싶다.
이 책들을 필독도서로 추천하는 이유는 보통사람 출신의 훌륭한 대통령인 트루먼을 통해 참정치가의 모습을, 링컨의 명연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참민주주의의 성장과정을 배우는 한편 새롭게 전개되는 미국·유럽·일본의 경제전쟁을 다룬『머리 대 머리』를 보면서 우리의 입장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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