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잡다“민정창당”/민자호로 옮겨탄 5공실세 이상재(의원탐구: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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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보안사 준위로 언론통폐합 간여… 13대땐 낙선/“조직서 시킨일 사욕 안채웠다”
노태우대통령이 민자당 총재직에 있던 마지막 날인 지난 8월25일 무소속의 이상재의원(충남 공주)이 민자당에 입당했다.
『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미력이나마 힘을 보탰던 저로선 이왕 입당할 바에야 노 총재 재임시에 하는게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욕과 논란」의 정치인,이 의원의 직선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당선 이후 민자당 입당을 권하는 지역 지지자들에게 『대선때 민자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겠다는 약속을 먼저 하라』고 오히려 설득해 어느정도 지지자들의 언약을 받고 입당을 결심했다.
그의 일생을 통해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사심 없이 책임감과 성실성을 발휘했던 일면을 입당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이 이 의원을 아는 주의의 평이다.
이 의원은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언론통제 및 통·폐합 작업에 참여해 아직도 논란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정치인이다. 이미 88년 5공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서 여론재판을 받았고 검찰에 고발까지 당한데다 지난 선거때 경쟁후보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은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3대보다는 모든 것이 악조건인 상태에서 민자당후보 윤재기 현역의원을 누르고 국회에 당당히 당선,격동기때 그에게 씌워졌던 올가미를 부분적으로나마 벗었다. 이렇게 볼때 이 의원은 저력과 논란을 몰고 다니는 정치인중 한사람이다. 81년 보안사 수사관에서 민정당 조직관리책임자(사무차장)로 변신,5공 내내 실력자군에 속했다가 13대 총선에선 반5공 태풍에 떠내려 가는 반전을 겪었다. 그는 또 보안사에서도 「간첩 잡는 귀신」이었다가 80년 계엄하에선 「전공」과는 아무 관계 없는 언론검열·통폐합 작업의 핵심에서 일했다.
그는 자신의 부심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사심 없이 일했으므로 후회는 없다. 시대의 흐름에 떼밀려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며 지금은(14대승리) 나를 다시 찾았다.』
정치인 이씨를 검증하기 위해선 그의 경력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공주 영명중·고를 거쳐 59년 군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20년간 그는 보안부대에서 대공업무에 몸담았다. 업무가 특수한 탓에 보안사 준위로 그는 「강기덕전무」라는 가명을 썼다.
그가 실력을 발휘했던 대간첩업무는 모두 3백여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80년 5·16 민족상 안보분야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일솜씨는 10·26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항로를 바꿔놓았다. 대공처 공작과 남영동 분실장으로 있던 그는 합수부의 언론조정관으로 뽑혔다. 당시 언론계에 두려움과 경원의 대상으로 유명했던 「강 전무」의 출현이었다.
제2의 변신은 81년 1월.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잠시 거쳐 그는 창당을 8일 앞둔 민정당의 조직국장으로 임명됐다.
대선·총선을 무사히 치른후 그는 4월 사무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4년5개월간 그는 당실세중 한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11대국회 전국구 공천을 끝까지 사양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안사준위 출신이 실세로 「호령」하면서 의원직까지 가질때 야기될 여러 부작용과 반발을 고려했다는 후문이다. 이 시절 그는 당내에서 「조직의 명수」로 불렸고 자신도 이 때를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
『위원장의 사병처럼 되어 있는 조직을 공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습니다. 10만 당원을 연수시켰죠.』
12대 전국구를 거쳐 13대에 그는 지역구에 뛰어들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조직의 귀재」도 반5공 바람과 JP태풍에 어쩔 수 없었다.
시련은 꼬리를 물었다. 청문회에 섰고 90년 3당합당으로 지구당마저 빼앗겼다.
이 의원은 지난 3·24 총선때 인생의 최대승부를 걸었다고 말한다. 전주이씨,영명동동창·백제장학회 출신 5백여명을 정예조직으로 엮어 죽기 살기로 뛰었다고 한다. 『난 돈이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상가에도 3만원씩 밖에는 못가져 갔어요. 게다가 무소속은 불리한게 많아요. 상대방이 방해할까봐 일정은 1급비밀로 숨겼지요. 두더지처럼 표밭을 파고들었습니다.』
이 의원은 자신의 논란 많은 경력에 대해 두가지 논리로 맞서고 있다.
첫째,80년 일은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직의 업무」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언론통폐합·언론인 숙정에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보안사 준위로 조직의 명령·윤리에 따른 것입니다.』
둘째는 개인적 욕심을 챙기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는 20년전 서부이촌동에 4층짜리 다세대형 주택을 지었으며 지금도 허름한 그집(시가 5억원)이 재산의 전부라고 얘기한다. 『내가 실세였다고 하지만 5공을 거치면서 내재산에 덧붙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심이 없었다는게 경력상의 오점을 변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청렴과 강직함은 그의 지지자거나 적대자거나 모두 인정 하는 그의 강점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14대에는 국회의원,장·차관들이 의무적으로 재산을 공개하는 법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김진기자>
□이상재의원 약력
▲충남 공주 출신(58) ▲영명고 ▲명지대졸 ▲보안사근무(준위예편) ▲계엄사 언론검열 책임자 ▲대통령 사정비서관 ▲민정당 조직국장·사무처장 ▲12대 전국구의원 ▲민정동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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