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YS 쌍두체제/눈치보기 바쁜 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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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관들 앞다퉈 총재에 현안 보고/표 전략 우선… 소신행정 실종우려
김영삼민자당총재를 대하는 행정부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불과 얼마전 대통령후보겸 당대표였던 때와 또 다르다. 각 장관들은 으레 주요 현안보고를 김 총재에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김 총재측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경향이다.
지난 1일 있었던 이연택노동장관의 체불임금 조기청산 대책보고가 단적인 예다. 지난 6월 김 총재가 당대표로서 대통령후보가 된 직후 보사·동자장관의 업무보고를 받을때만 해도 당 내외의 눈길이 곱지 않았었다. 특히 청와대쪽의 반응이 좋지 않아 곧 중단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장관들도 청와대 눈치를 덜 보고 청와대 역시 체념하는 눈치다.
김 총재측은 노동장관의 국정보고를 시발로 당정협의란 명목으로 각 부처장관들의 현안보고를 정례화할 움직임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가타부타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권련이동의 한 양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자당 관계자들은 『김 총재가 단순히 대통령 후보가 아닌 집권여당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국정현안에 대해 담당장관과 사전협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국정의 대목대목이 모두 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추곡수매가·공무원 봉급인상 등은 김 총재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노 대통령을 보고 표찍을 사람보다 김 총재에 대한 기대 가능성으로 판단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변화는 김 총재나 민자당이 요구해서 일어나는 측면보다 정부 관료들의 자발적인 생존노력 때문에 일어나는 측면이 더 강하다. 특히 지금까지 관료들의 생리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동통신 자진반납」파동을 겪고 난후 관료들의 김 총재에 대한 인식이 급격이 바뀌었다. 『김 총재가 반대하면 아무일도 안되는구나. 눈치껏 빨리 줄서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이제 행정부 자체의 힘으로 내부의 권력누수 현상을 막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며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관료층이 당과의 밀착과 김 총재에 대한 국정보고의 필요성을 한층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당정의 가교역할을 맡는 정무1장관실의 한 고위관료도 『3공 이후 정부의 모든 법률안 제정은 반드시 여당과 협조해 왔으며 국민생활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시행령안·주요정책까지도 당과 협조해야 한다는 총리훈령이 있다』며 김 총재에 대한 행정부의 태도변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대통령과 집권당의 총재가 분리됐던 적이 세번 있었지만 현재의 노태우­김영삼 관계와는 판이했다.
10·26 이후 최규하대통령과 김종필공화당총재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어느 한쪽도 공직사회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채 양쪽 모두 패자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두환대통령과 노태우민정당총재로 분리됐던 87년 여름에는 전 대통령이 끝까지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퇴임 후에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 「섭정」할지도 모른다는 시사를 풍겨 관료들은 특별히 좌고우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이통사건으로 대통령의 힘이 앞당겨 쭉빠진 반면 김 총재의 어깨엔 갑자기 힘이 붙었다. 권력에 민감한 관료들은 아직도 인사권을 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김 총재에게 다가가는 묘책을 찾기에 나름대로 궁리를 짜고 있다. 지난달 19일 김영삼대표(당시)에게 정부측의 증시부양 대책을 보고한 이용만재무장관의 경우 사전에 이진설경제수석 등과 협의를 거쳐 청와대측에 사전보고의 예의를 갖추었다. 개인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처럼 장관들은 노 대통령에 대한 사전보고 부담과 김 총재에 대한 실질보고 사이에서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지난 1일 보고를 한 노동장관도 사전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통해 노 대통령에게 사전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야흐로 국정운영에서의 쌍두마차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에 대한 청와대측의 반응은 한마디로 「역불급」이라는 쪽이 지배적이다. 이통파동 이후 비서실 직원들의 의욕과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대통령을 잘못 보좌했다는 자책감과 무력감이 교차하고 있다. 별정직 비서관들은 앞으로의 자리걱정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3년만에 비서실을 순시한 것도 사기진작용이다.
노 대통령은 총재직 사퇴후 첫 국무회의에서 『나의 총재직 사퇴와 관계 없이 정부는 민자당과 긴밀한 협조를 강화해 나가라』고 지시했다. 행정부측은 이같은 지시를 김 총재에 대한 상당한 「배려」를 허락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총리와 당대표가 참석하는 고위당정 정책조정회의엔 이제 김 총재가 빠지고 김종필대표가 대신 참석한다. 김 총재는 장관들을 직접 불러 상대한다.
행정부측은 김 총재의 본격적인 대선유세가 시작되면 지역개발 등 각종 공약사업 추진을 위해 기존의 「당전문위원­부처기획관리실장」의 통로,또는 당대선 정책공약 개발특위(위원장 황인성)와 부처책임자간의 「협조」를 강화할 태세다.
당정의 이같은 발맞춤은 공무원봉급(당 5%­정부동결)과 추곡수매가인상(당 7% 8백50만섬­정부 5% 6백만섬)에서 이미 나타나듯 표 위주의 당과 안정위주의 정부간에 적지 않은 마찰을 빚을지도 모른다.
또한 당의 무리한 압박으로 중하위직 공무원의 반발감을 조성할 경우 오히려 85만 공무원 표의 향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위험부담도 있다.
대권고지를 향해 제동장치 없이 달려갈 수 밖에 없는 여당에 적절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행정부의 소신이 떠내려갈 우려도 정부 일각에선 나오고 있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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