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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에게만 허락된 길, 통신사 일행에게 내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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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조선통신사 일행은 1607년 5월 17일 교토를 떠나 에도(江戶)로 향했다. 그때 에도 막부(幕府)는 통신사들의 여정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며 각별한 신경을 쏟았다. 막부의 최고책임자인 쇼군(將軍)만 다니던 큰길을 통신사 일행에게 내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쇼군의 이런 정성은 통신사를 자신의 위상을 한껏 드높이는 데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피로 피를 씻는 전국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다이묘(大名)로 불리는 지방 영주들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한때 전쟁을 치렀던 조선과의 평화가 절실했다. 당시 유학과 의학 등 학문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외교사절을 정기적으로 초청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일 필요도 있었다. 통신사 초청에 드는 막대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다이묘들에게 떠넘긴 것도 통치술의 하나였다. 통신사 일행은 이런 환대 속에 일본의 대표적인 명승지 비와코(琵琶湖)에 감탄하고 비옥한 들판을 지나며 에도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 도로에 남긴 통신사의 위상=교토를 떠난 일행은 나카센도(中山道)라 불리는 대로를 따라 북상하다 야스(野洲)라는 곳에서 나카센도와 갈라져 히코네(彦根)까지 '조선인 가도'라는 특별한 길을 이용했다. 1607년 통신사의 부사(副使) 경섬은 "도로가 넓고 잘 닦인 데다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줄지어 심어 천리길이 푸른 녹음으로 이어졌다"고 칭찬했다.

원래 이름이 교가이도(京街道)였던 이 길은 에도 막부에 큰 의미가 있다. 도쿠가와는 1600년 9월 세키가하라(關ヶ原)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일군의 장수들과 싸워 이겨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에도 시대를 열었다. 조선인 가도는 도쿠가와가 싸움에서 이긴 몇 년 후 교토의 일왕을 만나러 갈 때 이용했던 길이다. 승리의 길이자 개국의 길이었던 셈이다. 에도 막부는 그동안 이 길을 쇼군 외에는 누구도 못 쓰게 했다. 하지만 통신사에게만은 예외로 내준 것이다.

조선인 가도의 흔적은 오우미하치만(近江八幡) 시립 자료관 앞에 남아 있다. 가와치 미요코(河內美代子) 자료관장은 "조선인 가도는 야스에서 히코네 도리이모토(鳥居本)까지 41㎞에 달한다"며 "1607년 첫 통신사 때 다른 길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고 막부의 위신도 고려해 좋은 길을 내줬는데, 그 뒤에도 이것이 관례가 됐다"고 설명했다.

오우미하치만시에 남아 있는 옛 조선인 가도와 이를 알리는 표석. 통신사 일행은 쇼군만 다니던 이 길을 따라 에도로 향했다.


◆ 통신사와 쇼군만 이용했던 배다리=조선인 가도는 명승지인 비와코를 지나게 돼 있었다. 비와코는 고단하고 위험한 길을 오갔던 통신사 일행이 후지산과 함께 최고로 꼽았던 명승지였다. 1624년 통신사의 부사 강홍중은 "경치의 뛰어남과 기세의 웅장함은 중국의 동정호도 못 따라올 것"이라고 평했다. 1719년 통신사 때의 신유한도 "아득한 산은 구름을 껴안고 멀고 가까운 고깃배는 황금빛 갈대와 오래된 대나무숲 사이를 오가고…"라며 빼어난 경관을 노래했다.

통신사 일행은 스리하리(摺針)라는 고갯길에서 비와코를 뒤로하고 세키가하라를 지나 지금의 나고야(名古屋)까지 드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갔다. 이 들판을 지날 때 에도 막부는 통신사를 위해 배다리 센쿄를 만들었다. 평야에는 크고 작은 하천이 있었지만 다리는 없었다. 당시 일본의 축성.토목 기술로 다리를 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에도 막부가 이를 막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언제 다시 지방의 다이묘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천을 건널 때는 지체 높은 다이묘라 해도 작은 나룻배로 옮겨 타야 했다.

비사이 역사민족자료관에 있는 센쿄 모형.

쇼군 자신은 미리 수십~수백 척의 배를 가로로 엮어 튼튼하게 고정한 뒤 그 위에 판자를 덮은 센쿄를 가설해 건너갔다. 통신사 일행에게도 같은 배다리가 제공됐다. 센쿄는 만드는 데 길면 반년이나 걸렸지만 통신사가 지나고 나면 바로 허물었다.

센쿄는 임시 시설이었던 만큼 지금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치노미야(一宮)시 비사이(尾西)에는 과거 센쿄가 있었던 곳이라는 기념비와 센쿄의 모형과 그림이 남아 있다. 비사이 역사민족자료관의 고즈카 히로미(小塚ひろみ) 연구원은 "자료에 따르면 에도 시대를 통틀어 이 지역에 센쿄를 만들어 건넌 것은 쇼군과 통신사뿐이었다"고 말했다. 통신사 행차가 에도 막부에 얼마나 중요한 의식이었는지 보여 주는 것이다.

"선진문화 전해준 이색 구경거리
통신사 행렬 재현하는 전시 열어"
오가키 시립향토관

기후(岐阜)현 오가키(大垣)시는 통신사가 나고야로 가던 길에 하루 묵었던 도시다. 당시 번화한 교통 중심지였던 이곳에는 조선 야마(山車.다시라고도 읽음)라는 수레와 장식품 등 흥미로운 유물이 남아 있다.

야마는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마쓰리(축제) 때 쓰는 수레로 지방마다 특색 있는 장식을 한다. 이 마을에는 통신사의 행렬을 재현, 조선시대 고관의 의복을 그대로 모방한 인물상과 깃발 등으로 꾸민 수레가 전해진다.

1964년 이 유물이 처음 발견됐을 때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다케시마(竹嶋)라는 마을의 오래된 창고에서 발견됐는데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를 숨기려 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통신사를 조선의 조공사절로 낮춰 보는 메이지 일왕 시대 이후의 편견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화려한 장식과 유물이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공개하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다.

이후 통신사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방송 등에 소개되면서 지금은 오가키 시립향토관의 중요한 전시품목이 됐고, 관련 전시회도 열린다. 오하시 가즈요시(大橋和義) 향토관장은 "당시 오가키 사람들이 통신사의 행렬을 관찰해 값비싼 비단으로 의복을 재현하고 인형을 만드는 등 정성을 들여 꾸몄다"며 "앞선 문화를 전해주고 이색적인 구경거리도 됐던 통신사 행렬을 기념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신사가 오가던 길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시가현 다카쓰키(高月)에는 아메노모리(雨森)라는 마을이 있다. 18세기 초 한.일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1711, 1719년 통신사 때 일본 쪽 안내 역할을 맡았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호슈서원(書院) 또는 '동(東)아시아 교류 하우스'라고 불리는 기념관이 남아 있다.

히라이 시게히코(平井茂彦) 관장은 "아메노모리는 상대방(조선)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면서도 통신사 일행에게는 자신의 조국 일본의 문화를 알리고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등 외교관의 자세를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기념관처럼 일본에서는 통신사와 관련된 흔적을 재조명하고 발견된 유물을 보존하는 노력이 활발하다.

"양국 우호관계 닦은 친선 사절
일, 침략 정당화 위해 깎아내려"
통신사 연구 대가, 나카오 히로시 교수

나카오 히로시(仲尾宏.사진) 교토조형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손꼽는 조선통신사 전문가다. 사학이 아니라 고미술 전공자인 그가 통신사 연구의 대가로 인정받는 것은 몇 가지 뚜렷한 업적 때문이다. 그는 1996년 재일사학자 고(故) 신기수 선생과 함께 통신사와 관련한 유물.유적, 각종 서화 등 자료를 모아 모두 8권의 '선린과 우호의 기록-대계(大系) 조선통신사'를 발간했다. 지금도 통신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자료다. 2001년에는 NHK 교육방송에서 아홉 차례 방송된 '조선통신사' 프로그램의 내용을 다듬고 직접 진행했으며 그 내용을 책으로 냈다. 이는 일본에 통신사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통신사와 관련한 일본 학자와 전문가들의 네트워크로 1994년 결성된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의 핵심 멤버로 모임을 이끌어 온 것도 나카오 교수다. 이 모임은 지금도 일본에서 통신사 관련 행사와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교토에서 만난 그는 "통신사는 한마디로 두 나라를 대등한 관계에서 이어 준 우호친선의 사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사실이 두 나라에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그는 덧붙였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통신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소수였고 별 시선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통신사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대등한 우호친선의 사절'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메이지 일왕 이후 일본 정권은 전임자인 도쿠가와 정권의 실적을 낮게 평가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당시 약소국인 한국과 중국에 진출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침략 전쟁과 이를 수행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나라가 친하게 지냈음을 증명하는 통신사의 역사는 눈엣가시였다는 설명이다.

나카오 교수는 "재일 사학자들의 오랜 실증 연구 끝에 통신사에 대한 일본 내 인식은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다"며 "80년대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통신사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모두 다룬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두 나라 전문가들이 공동 연구와 세미나를 통해 통신사의 업적을 더욱 많이 복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박소영.이승녕(국제부문).김태성(영상부문) 기자,예영준.김현기 도쿄 특파원

◆ 도움말=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토 조형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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