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무관"증언 김학전씨 석방|황 교수 부인 무죄입증 동분서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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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의 회고.
『수사중인 간첩사건이었는데도 박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황 박사를 끔찍이 챙겼어요. 「황성모가 진짜 공산당이냐」고 자꾸 묻는 거지요. 부장(김형욱)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정보부장 사무실은 이문동에 있었는데, 김 부장은 황 박사를 그곳까지 데려오게 해 직접 면담한 일도 있어요. 박대통령도 보고 석상에서 나에게「황이 진짜 공산당인지 아닌지 잘 수사해 보라」고 지시하기도 했고요. 한번은 SK(김성곤)가 나를 신문로 자기 집으로 불러「이 사람아, 우찌된 일이고」라며 황 박사 건을 물어보더군요. 사건경위는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하니까「각하(박대통령)께서도 심증을 못 굳히는 눈치다.

<"손찌검하지 마라">
황 박사는 쓸만한 인재니 잘 좀 선처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황 박사의 처남이 당시 한국은행총재(서진수)였는데,SK의 경북고 후배인데다 금융계 인사여서 잘 아는 처지였던 모양입니다. 이런 판이니 내가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황 박사를 담당한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요. 「각하까지 관심 갖고 계신 사안이다. 절대 손찌검하지 말아라. 잘못하면 큰일난다」고 말입니다.』
고문사실에 대해서는 지금도 펄쩍 뛰며 부인한 이씨는 당시의 수사자체에 대해서는『황 교수 등의 간첩혐의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 다른 사건(동백림 사건) 과 민비연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것도 잘못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때는 북한과 첨예하게 대림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일개수사실무자인 나는 윗 선에서 결정된 수사방향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졸지에 황 교수를「수괴」로 모시게 된 민비연 서클의 전·현 회원들과 관계자들 30여명은 한차례 이상씩 정보 부로 불려가 간첩단 관련여부를 신문 당했다.
이중 재판에 회부됐던 이종률·박범진·김중태·현승일·김도현·박지동·김학준 등 7명은 나중에 자신들을「황야의7인」이라고 농담 섞어 명명했다.
당초 민비연을 동백림 사건과 연결시켰던 것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정보 부 측이 뒤늦게 별도사건으로 분리함으로써 자연 해소됐다.
『처음 연행돼서는 치안 국 정보과에서 조사 받다가 곧 이문동 중앙정보 부로 끌려갔습니다. 자기들이 부르는 대로 진술서를 쓰라는 식이었어요. 박범진같이 죽어 라고 버티며 거부한 측은 매를 많이 맞은 것으로 압니다.』(이종률씨)
『67년6월25일 홍은동자취방에서 아침밥을 먹다가 끌려갔습니다. 왜 붙잡혀 가는지도 몰랐어요. 수사관이「황 교수가 간첩인 것을 알고도 그의 지시대로 간첩행위를 했다」고 자술서를 쓰라는데 그대로 썼다가는 정말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가족 중에 월북자가 있어 그전에도 연좌제에 걸려 줄곧 피해를 보았던 처지였습니다. 끝까지 거부했어요. 재판 받을 때 알았는데, 나 혼자만 그런 자술서를 쓰지 않았더군요.』(박범진씨)

<박범진씨 시인거부>
조사 받는 과정에서 당시 신혼이던 김학준씨(49·현 청와대공보수석비서관)는 동료들이 「입을 맞추어」민비연과 무관하다고 증언해준 덕분에 1개월만에 풀려나올 수 있었다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김씨의 회고.
『그때 나는 조선일보기자로 재직하던 중이었습니다. 정보 부에 끌려가서 터무니없는 진술을 강요받았는데…이틀쯤 지나니까 도저히 못 버티겠더군요. 끝까지 버틴 박범진씨를 그래서 나는 지금도 존경합니다. 기소단계에서 무사히 풀려나긴 했지만 한번 받은 혐의가 줄곧 나를 따라다녔어요.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같은 것이 나면 경찰서에서 형사가나와 그동안의 내 행적을 묻고…나는 기자다, 신문 보면 내기사가 나오는데 구태여 행적을 물을 것까지 있느냐고 하면우리(경찰)는 그런 거 모른다. 여하튼 당신의 거동만 보고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땅이 싫어지고, 나로 인해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안사람과 이혼할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어요.
미국유학을 결심했는데 이번에는 비자가 안나와 애를 먹이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유학이 성사됐고, 돌아와서 대학에서 강의할 자리를 알아 보게됐습니다. 그런데 또 신원조회에 걸린다는 거지 뭡니까. 은사님들과 주변에서 애써 주신덕분에 아주 어렵게 서울대(정치학과)강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사건의「주범」인 황 교수에게는 독일유학 중 북한요원과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부인 서봉연씨는 정보 부와 검찰을 상대로 남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수년간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황 교수와 김중태씨는 결국 2년형이 확정돼 복역했다.
『검찰이 주장한 혐의가 턱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제 남편과 같이 서독에서 유학했던 한 일본인학자의 증언을 얻으려 한 일이 있었어요. 학술회의 같은 일로 일본에 가게된 분들께 부탁했지만 매우 가까웠던 분들도 매정하게 거절하더군요.
간첩 한번 돼 보십시오. 주변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가까스로 친족 한 명이 응해준 덕분에 그 일본인학자로부터 유학당시의 일기장 사본 등을 입수해 증거물로 제출했어요. 또 한번은 정확한 독일유학기간을 반대증거로 제출할 필요가 있어 재학증명서를 얻어야 했는데, 도대체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가명으로 편지를 보내도 서신검열 때문인지 전혀 전달되지 않더군요. 이 일은 결국 한국근무를 끝내고 귀국하던 영국인 평화봉사단원이 해주었습니다. 영국인이 독일까지 가서 남편이 다닌 세 군데 대학을 다니며 재학증명서를 떼보내준 겁니다.』

<일 학자에 증거부탁>
서 교수는『국가기관이 자기필요에 따라 한 개인을 잡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지만 당하는 개인은 평생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법』이라며『다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또 당시 재판에 관여했던 한 판사가 사석에서 한말을 전해듣고 치를 떨었던 기억을 전해주었다.
『그 판사가 어느 자리에서 내 친지에게「황 박사가 참 안됐다」고 걱정해 주더라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하지 않은 행위(간첩행위)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는 법이니까요」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무죄를 입증하려고 그렇게 애써 제출한 반박자료도 애초부터 소용없었다는 뜻 아닙니까.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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