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문씨 '전방위 로비'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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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수 경찰청 감사관이 25일 오후 경찰청에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과 관련한 감찰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경찰의 감찰 조사에서 그동안 김승연 한화그룹 보복폭행 사건 수사와 관련한 의혹들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특히 한화그룹 고문인 최기문 전 경찰청장은 홍영기 서울경찰청장을 비롯해 서울경찰청의 수사부장-형사과장-남대문서장 등 수사 지휘선상에 있던 간부들과 연락하면서 '사건 무마 로비'를 주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사건 내사는 형식적으로 진행했고, 늑장수사로 이어졌다.

◆ 전방위 로비, 형식적 내사=경찰청 감찰 결과에 따르면 최기문 고문은 사건 발생 나흘 만인 3월 12일 장희곤 남대문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사 여부를 물었다. 첩보를 입수한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발 빠르게 내사를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이어 한기민 서울청 형사과장에게 두 차례 청탁 전화를 했다. "사건이 접수되면 잘 처리해 달라"는 청탁을 했다고 한다. 한 과장은 "내 권한 밖이니 수사부장이나 서울청장에게 전화하라. 남대문서와 빨리 협조해 처리하라"고 권고했다는 것이다. 김학배 서울청 수사부장도 최 고문과 '김 회장의 경찰 출두 요구서 발부'와 관련해 두 차례 통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25일 사퇴한 홍영기 서울청장은 3월 15일 최 고문과 식사를 함께했다. 홍 청장은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식사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사건 관련 얘기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 수사팀, 조폭 만나고 허위보고까지=최 고문의 청탁 전화에 경찰 간부들은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내사를 담당한 광역수사대에서 남대문경찰서로 사건을 넘기도록 했다. 경찰청 감사관실은 "대기업 총수가 폭력배를 동원해 감금과 폭행을 벌인 사건이므로 광역수사대에서 처리하는 게 옳았다"고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김 수사부장은 광역수사대의 반발이 크다는 보고를 받고 "잘 설득하라"고 추가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남대문서는 형식적인 내사로 일관했다. 수사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았고, 탐문수사를 소홀히 해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내사 대상자 이름을 김 회장 대신 김 회장 차남(21)으로 바꿔 적고, 가해자가 폭력배가 아니라 경호원이라고 고치는 등 허위보고까지 했다. 수사 실무자인 강대원 전 남대문서 수사과장과 이진영 전 2팀은 한화 측이 동원한 조직폭력배 '맘보파' 두목 오모(54)씨와 세 차례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 뒷돈 거래 의혹=감찰 결과 징계 대상자들의 비위 사실은 밝혀냈지만 그 동기에 대해선 확인하지 못했다. 특히 금품이 오간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됐지만 규명하지 못했다.

강 전 과장은 24일 "한화 측이 '평생 보장해줄 테니 봐 달라'고 회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루 만에 번복했다. 조폭 두목 오씨를 알고 있는 폭력조직의 한 간부는 본사 기자에게 "오씨가 조폭 동원과 사건 무마의 대가로 한화 측으로부터 3억원을 받기로 했는데, 선수금만 받고 잔금을 못 받아 남대문서의 힘을 빌리려 했다"고 전했다.

경찰 지휘부도 금품 로비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서울청 김 수사부장과 장 남대문서장은 금품수수 의혹으로 검찰에 수사의뢰됐다. 김 수사부장은 "로비 때문에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 서장도 최 고문의 로비를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 이택순 청장은 몰랐을까=감찰 조사에서 최 고문이 수사 지휘라인에 있던 간부들에게 전화통화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포착했다. 홍 청장도 최 고문과 저녁식사까지 한 사실은 밝혀져 사표를 냈다.

그러나 유독 이택순 청장은 전혀 관련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 고문이 서울경찰청장까지 로비했을 뿐, 그 윗선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형수 경찰청 감사관은 "한화증권 유모 고문과 이 청장이 통상 1년에 서너 차례 통화한다. 유 고문에게 확인했더니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통화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경찰 스스로 경찰의 최고위층을 조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는 감찰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려면 검찰 수사가 더 적합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검찰이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해 재수사하라는 뜻이다.

이철재.천인성 기자

◆ 최기문(55) 한화그룹 고문=2003년 3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경찰청장으로 재임했다. 노무현 정부의 첫 청장이자 임기제 첫 청장이었다. 2년의 임기를 보장받았으나 임기 만료 석 달을 앞두고 사퇴했다. 당시 경무관급 이상 간부 인사에서 여권 고위층과 의견 충돌을 빚다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계명대 법경대 경찰학부 초빙교수와 한국경찰학회 부회장을 맡았다. 한화그룹에는 올 1월 고문으로 영입됐다. 경찰 총수 출신이 대기업 고문으로 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래서 한화그룹이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 경찰청 기획정보심의관 등 최 전 청장의 경력을 보고 영입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김승현 회장 사건 이후 최 고문의 전화를 받은 경찰 지휘부는 모두 그의 밑에서 참모생활을 했다. 홍영기 서울경찰청장과 김학배 서울청 수사부장은 이 고문의 청장 재임 시절 경찰청 혁신기획단을 이끌었다. 장희곤 남대문서장은 최 고문의 고등학교(경북사대부고) 후배다. 이 인연으로 최 고문의 청장 취임 당시 국회인사청문회 대책팀장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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