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41기 KT배 왕위전' 실패한 집중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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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4강전>

○ . 한상훈 초단 ● . 박영훈 9단

제6보(68~82)=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이 판을 지배하고 있다. 백△석 점은 흑이 소중하게 품었던 '알'이었으나 이 알이 어느 순간 흑의 배를 가르고 나와버렸다. 흑은 걷잡을 수 없는 출혈에 심신이 혼미해졌고 마치 격랑에 휩쓸리듯 어디론가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70으로 집을 벌며 쫓는다. 흑이 나갈 길은 71 단 한 곳. 박영훈 9단이 제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지녔다 해도 지금은 백의 지시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한상훈 초단은 72로 머리를 내밀어 놓고 73의 도주를 가만히 지켜본다. 최고조의 흐름을 타고 있는 그의 온몸은 손끝에 발끝까지 신기(神氣) 비슷한 것이 넘실대고 있다.

74로 꽝 씌운다. 프로들이 말하는 '따끈따끈한 모자 한 방'에 흑은 숨이 컥 막혀 온다. 날일자가 강력한 공격이라지만 정면에서 진로를 막는 모자에는 어림없다.

괴로워진 흑은 잠시 75로 백을 위협하며 한숨 돌려 보지만 76, 78이 준비된 삶의 수순. 마치 각본이 짜진 듯 백은 박자가 척척 맞아떨어진다. 결국 흑은 다시 '대마 살리기'라는 회피할 수 없는 현안으로 돌아간다. 단지 목숨만 구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리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고 무슨 수를 쓰든 중앙 백을 함께 진창 속으로 엮어넣어야 기회가 있다.

한데 흐름을 탄 한상훈은 좀체 말려들지 않는다. 82만 해도 흑에 탄력을 주지 않으려는 용의주도한 행마다. 박영훈도 거듭 후회하고 있겠지만 흑은 백△석 점을 잡기 위해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그 돌이 살아가자 온통 상처투성이가 됐다. 집중 투자는 역시 위험한 도박인가.

괴롭게 신음을 토해 내던 박영훈은 혼신의 힘을 다해 83으로 도발해 갔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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