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자선행위가 신뢰지수 높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한 국가의 경쟁력을 말할 때 흔히 '사회적 자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로 가늠하곤 한다. '사회적 자본'에는 영토.부존자원.인구 등 물질적인 것은 물론 기술.정보화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에는 '자발적 사회성'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풍부하다. 자발적 사회성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회구성원 간에 '자율적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법이나 규정으로 강제되지 않았으나 상호 간에 지켜야 할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 그 책임과 의무가 혈족관계를 넘어 '남에게 그대로 확대되는, 그야말로 공동체적 연대감으로 결속된 사회가 갖고 있는 자산'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통법규를 지키자' '물을 아껴 쓰자' '어려운 이웃을 돕자'라는 캠페인성 구호가 없어도 국민 개개인 스스로 법과 공동체적 규칙을 준수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가 될 수 있는가? 후쿠야마 교수는 그 핵심을 한마디로 '신뢰'라고 말한다. 강한 공동체적 연대를 가진 사회는 '고신뢰 사회'이며, 공동체적 연대가 무너진 사회는 '저신뢰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뢰'라는 문화적 코드가 경제적 번영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고 한다.

요즈음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IMF 때도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고 난리들이다. 카드빚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 어린 자식을 겨울 강물에 던져버린 비정한 부정도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적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변해 핵가족이 된 지 오래고, 최근 이혼율이 급증하는가 하면 가족 해체와 노인문제 등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일찍이 이런 과정을 거쳤거나 또는 개인주의가 발달했던 나라에서는 이미 공공부문들이 사회보장제도와 그 책임을 맡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미처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혈연책임주의는 이미 소멸돼 가고 있다. 그렇다고 선진국처럼 중간 사회조직이 단단히 형성돼 있지도 못하다. 가족 구성원 간에 가졌던 책무감을 이제는 사회적 책무감으로 바꾸어야 하며 그것이 매우 미약한 것이다.

고신뢰 사회는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민간조직을 만들고 모금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미국 공동모금회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가 1백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일본과 독일도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사회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든, 서비스든 무엇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 예외가 바로 기부나 자선이라는 행위인데 대가 없이 그것도 부모.형제나 친척이 아닌 나와 관계가 없는 남에게 주는 금전 또는 재산적 가치의 기부는 신뢰를 밑바탕에 두지 않는 사회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서울시청 앞에 세운 '사랑의 체감 온도탑'은 전국에서 모금된 이웃돕기성금 액수에 따라 온도를 높여 가족 아닌 남에게 우리가 얼마나 관심과 책임을 느끼고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사회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신뢰지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가 지난 가을 방한했을 때 한국은 자신의 신뢰기준으로 분류하기 매우 어려운 예외적 요소가 많은 나라라고 인정했다. 혈연.학연.지연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저신뢰 사회에서는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세계적인 기업을 가지고 있고, 세계 공동모금회 중 최고의 모금 성장률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저력과 열정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사회공헌 활동을 단순한 자선이나 기업홍보가 아닌 사회적 투자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분명 고신뢰 사회로 가는 문턱에 있으며, 희망2004이웃돕기캠페인은 그 출발이 될 것이다.

윤수경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