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대한민국 엄마 노릇 힘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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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 또 그 소리야. 미칠 것 같아…."

"문제도 어려운데 너무 시끄러워 시험을 망칠 거 같아요."

중간고사가 한창이었던 1일 오전 11시 경기도 과천중앙고 3학년 한 교실에서는 학생들의 이런 불만이 쏟아졌다. 교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집중해 문제를 풀어라"며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교실에서 불과 200m여 떨어진 정부과천청사 앞 빈 터에서 열린 대규모 노조 집회에서 확성기로 외치는 구호와 꽹과리 소리에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집회는 한 달에도 5~6차례나 열린다. 이달만 해도 3일, 9일, 16일에 학교 옆에서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다. 이때마다 시끄러운 구호와 함성, 운동가요 소리가 중앙고를 뒤덮었다. 영어듣기 수업이 있는 날에 집회가 겹치면 수업이 무산되기도 한다.

과천중앙고가 개교한 것은 2000년 3월. 중앙고의 학생과 교사들은 개교 이후 지금까지 과천청사 앞에서 열리는 이런 상습적인 대규모 집회.시위의 피해자가 됐다.

특히 과천청사와 가까운 곳에 교실이 있는 3학년 학생들은 입시 부담감에다 소음 피해가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한다.

참다 못한 학부모들이 급기야 경찰서에 집회신고서를 내고 집회장소를 선점하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학부모 김은희(45)씨는 "그동안 학교 측과 학부모들이 관계 당국에 소음 대책을 수없이 요구했으나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며 "이제 엄마들이 거리로 나서 불법 집회를 반대하는 시위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시위를 막기 위한 침묵 시위'도 벌일 예정이다.

이처럼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 1월에는 시위대의 폭력으로 다친 전.의경의 어머니들이 "제발 폭력을 쓰지 말라"는 집회를 연 적이 있었다. 지난해 5월에는 평택 대추리를 지키던 군인들이 시위대에 맞자 어머니들이 폭력 시위 자제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공부하는 10대 학생들을 위해 어머니들이 소음으로 가득 찬 집회를 막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 학부모는 "정부가 엄격하게 불법 집회나 시위를 막아야 하는데 현 정부는 포퓰리즘으로 흘러 원칙대로 하지 않으니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다른 학부모는 "엄마들이 아이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게 한심하다"며 "엄마 노릇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신동근 교장은 "학생들의 수업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런 어른들의 무책임한 시위를 접하면서 학생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질서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정영진 사회부문 기자